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20)

새벽지기1 2016. 10. 13. 07:06


주 되심의 영성<하나님 형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단지 구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구속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한 것이고, 남들을 섬기기 위해 자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받게 하신 것이며(마가 10장 42-45절), 따라서 영원한 효과를 갖는 것이다(히 9장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고 하는 약속에 비추어 볼 때(롬 8장 21절), 새롭게 찾은 자유가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은 ‘값으로 산’바 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가면서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롬 8장 23절).


따라서 기독교의 전망에서 볼 때 사람의 자유는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유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하셨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이 자유를 완전히 경험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성령을 통해 구속에 대한 기업을 기다린다(엡 1장 14절). 사도 바울에 따르면,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 3장 17절), 성령은 창조와 재창조에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희망과 현실의 긴장 가운데 살아가는 좌절을 알지만 많은 사람이 많은 형태의 속박에서 벗어나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가령, 신약시대 교회는 고대 사회에  새로운 덕 곧 자선을 나타내 보였고, 성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헌신되고 충성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새로운 자유를 누리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자와 여자가 마약, 사탄의 억압, 죄책감, 파괴적 관계, 일상 저지르는 가벼운 죄 등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절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신약성경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완전한 자유를 약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완전한 자유에 대한 약속과 희망은 너무나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도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갖는 자유는 역설적이다. 이 역설은 신적 자유의 본질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죄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족에서 노예가 아니라 아들과 딸로서(갈 4장 1-7절) 구속자 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롬 6장 17-22절).


사도 바울이 가르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장 1절). 자유가 갖는 역설적 본질은 그 개념 자체에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죄가 그것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 어떤 그릇된 행위도 하지 않은 사람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옳고 그른 것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그릇된 행위를 하면,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뒤이은 선택은 그릇된 행위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옳은 행위를 선택할 자유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오점이 있는 자유가 계속하여 행사됨에 따라 그것의 범위는 끊임없이 좁아져서 바른 선택을 거의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자유의 본질이 변질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벌인 논쟁에서 주장한 것이 바로 이런 형태였다. 곧 사람은 본래 선택할 수 있는 깨끗한 상태였다. 인류의 첫 사람들만 실제적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타락하자 사람의 의지는 계속하여 선택할 수 있으나 전적으로 선한 것을 선택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자유 의지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 오해할 수 있게 한다.  <계속> 

출처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