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23)

새벽지기1 2016. 10. 28. 11:18


주 되심의 영성<하나님 형상>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것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고(롬 1:25), 사람을 숭배하는 우상이다. 인간 생명의 신성함 이면에 있는 진리는 그가 전적으로 신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한 성경의 가르침을 뒷받침한다.


더구나 그리스도는 천사나 다른 피조물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으로 곧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가지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을 무시하거나 그 가치를 낮게 평가하면서 그것의 신성함을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럼에도 이 용어는 개인주의나 교만을 뒷받침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낙태와 안락사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이 갖는 양적 국면과 관련된다. 사람의 생명이 신성하다면 그것의 존재는 어떤 상태에 있든지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여겨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이 존엄한 것은 그가 갖고 있는 어떤 효용성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 그 자체 때문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남을 섬길 수 있는 재능을 주신다. 이 땅에 있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완전히 정상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죄 때문에 성품이 타락하였고 능력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일 때 손상된 인격이 용납되고 치유되며 회복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와 도움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믿음과 소망 안에서 현재 경험할 수 있다, 비록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현재 갖고 있는 믿음과 희망이 완전히 실현될 새 창조를 기대한다. 새 창조와 옛 창조를 잇는 다리는 바로 사랑이다(고전 13:13).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각기 담당하는 역할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영향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단단하고 힘이 세며 주도적이고 우람하게 보이지만 여성은 창작적이고 부드러우며 수용적이고 아름답게 보인다. 이러한 이해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일반의 생각을 나타내며 기독교 전통에서도 어느 정도 정당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반화는 남성과 여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바르게 아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갖고 있는 명확하고도 두드러진 모습을 왜곡시킬 수 있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전통에 따라 남성과 여성에 대한 기대가 다를 수 있다. 어떤 것은 한 성에게 매우 억압적이나 다른 성에게는 그것이 갖는 특유성을 보호하고자 한다. 오늘날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성의 불평등과 억압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


성의 차이를 최소화하려는 이러한 노력 자체를 통해서 성의 차이를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이러한 차이에는 생물학적이고 환경적이며 문화적 요인이 서로 밀접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규명하기가 근본적으로 어렵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각자는, 비록 비율이 서로 다르지만, 남성과 여성의 성품을 똑 같이 갖고 있다. 이러한 성의 이중성은 오늘날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날 남성으로서의 삶이나 여성으로서의 삶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학계에서 활발한 논쟁이 되고 있다. 최근까지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주로 생물학적 성의 차이에 초점을 두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중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성과 살아가는 모든 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이른바 여권주의가 대두되어 여성의 삶이 남성의 삶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고 있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