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온전한기독인

[2-3-2] ③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새벽지기1 2016. 8. 23. 07:32


③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우리는 창조 시에 하나님이 인간의 협력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추셨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분은 땅이 스스로 생산적이 되도록 창조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주셨다. 인간은 그것을 정복하고 경작해야 했다. 하나님은 인간과 협력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의존하셨다. 그 분은 스스로 번창하게 될 에덴동산을 건설하지 않으셨다. 그 분은 에덴동산을 건설하신 후에 동산지기를 지명하셨다.


여러분은 한참 여름에 아름다운 정원을 두루 안내받고 있던 다소 경건한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정원사는 화초가 잘 자라나 있는 화단으로 목사를 데리고 갔다. 그 곳은 멋진 색깔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 목사는 ‐ 목사들이 늘 그러하듯이 ‐ 경건해져서 “창조주 하나님은 얼마나 멋지신 분인가”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러자 정원사는 “이 정원이 하나님 손에만 있었을 때는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 목사님이 보셨어야 했는데요”라고 대답했다.


사실상 그 정원이 하나님의 손에만 있었을 때는 혼란 상태였다. 그래서 정원을 돌볼 정원사가 필요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셨다. 물론 이러한 작업에서 하나님의 역할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정말 옳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말한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심고 물을 주어도 하나님이 자라게 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수의 찬송가를 부른다. “저 밭에 농부 나가 씨뿌려 놓으니 주 크신 능력 내려 잘 길러주셨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협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말을 돌려서 표현하면, 우리가 심고 물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땅을 갈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신의 손이 대지를 축복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도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한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에게 의존하신다.


루터는 이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하여 소의 젖을 짜기까지 하신다.” 소에는 많은 양의 젖이 있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짜 내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동일한 진리가 의사에게도 적용된다.

여러분은 파리 의과 대학의 한 벽에 쓰여 있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상처를 싸맸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치유하셨다.” 그러나 이 말을, 하나님은 치유하셨지만 나는 그 상처를 싸맸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즉 내가 상처를 싸매는 것이 필요했으며 치료를 할 때 나는 하나님과 협동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인간은 경작자이다. 각각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창조와 경작, 자연과 문화, 원재료와 솜씨는 짝을 이룬다. 각각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라는 이 개념은 모든 고귀한 일에 적용된다. 하나님은 지구상의 생명체가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게끔 하셨다. 하나의 분명한 예로 어린아이를 들어 보자. 어린아이는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연약한 피조물이다. 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주님의 유업이며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물론 부모들이 아이의 출산에 관여하긴 하지만 우리는 아이를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는다.


하나님은 아이를 주실 때, 아이를 어머니의 무릎에 떨어뜨리고는 “이제는 네가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 고 말씀하신다. 수년 동안 그 아이는 부모, 선생, 의사 그리고 기저귀나 유모차 등 아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만드는 산업계 종사자들의 손에 의지한다. 이러한 인간적 노력이 없다면 아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인간이 자라서 성숙한 존재가 되기까지 우리의 협력에 의지하신다.


어른의 삶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비록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삶의 필수품들을 위해 서로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존은 음식과 의복, 주거지와 따스함, 그리고 건강, 돌봄과 같은 육체적 생활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레크리에이션, 여행, 문화, 예술 등과 같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인간의 짧을 부요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해서이기도 하다. 짧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부요할 수 없다.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이 원리는 적용된다. 여러분은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두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나는 시골 길을 따라 걷고 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즐겨 하곤 한다. 그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채석장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그들 증 및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한 사람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 사람은 다소 못마땅하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보면 모르겠소” “나는 지금 돌을 쪼고 있단 말이오” 그래서 그는 다음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물었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무얼 하고 있냐고요?”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나는 매주 150파운드를 벌고 있답니다.” 이번 에는 세 번째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세 번째 사람은 정을 내려놓고 일어나더니 자신의 가슴을 열어 젖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얼 하는지 알고 싶은가 본데, 나는 지금 대성당을 짓고 있소.” 여기에 일에 대한 상이한 태도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 하고 있는 일 이상은 볼 수 없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벌어들이고 있는 월급 이상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일의 궁극적인 결과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예로 든 경우에, 그것은 대성당이다. 그리고 우리 같은 목사들의 경우, 그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의사들의 경우, 그것은 건강이며 질병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질병과 죽음에 직면하여 분개하셨으며 그 희생자들에게 동정을 베푸셨던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에 대한 신적인 보증을 받는다.


나는 몇 년 전에 런던 포트에서 공중 건강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한 고급 관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런던 포트를 구경시켜 주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해 준 데 대해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것, 월급 봉투, 부수입, 사회적 안정 그리고 연금을 위해 일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좀 더 큰 인간의 활동 구조의 일부에 책임을 지고 있고, 또 이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우리의 재능에 따라,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고자 최선을 다하고, 우리의 경이로운 창조주의 뜻에 복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나는 매일 행복하게 일을 시작한답니다.” 여기에 자신이 하나님과 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서 성취감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일이란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일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자 한다. ‘일이란, 육체적인 일이건 정신적인 일이건 또는 둘 다이건, 일하는 자에게는 성취를, 공동체에는 유익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가져오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와 같이 일할 수 있도록 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참고 서적

김재영 편저 -- 직업과 소명(한국 IVP)

데이비드 필드 -- 직업과 소명(소책자 시리즈 12, 한국 IVP)

메리 화이트 -- 당신의 직업‐생존이냐,만족이냐(네비게이토 출판사)

벤 패터슨 -- 그리스도인과 일(소책자 시리즈 62, 한국 IVP)

해리 안토니데스 -- 그리스도인이 본 노동 문제 (한국 IV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