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단상

면역 억제제

새벽지기1 2016. 8. 16. 09:58


5월 12일 오늘은 나와 가족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다. 간 이식 수술을 한 지 꼭 3년째 되는 오늘은 많은 이로부터 사랑의 수혈을 받은 날, 기도와 수고의 세례를 듬뿍 받은 날, 아들과 함께 몸을 가른 날,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진 날, 죽음 같은 잠에서 생명으로 깨어난 날, 아들의 간을 절반씩 나누어 가진 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날, 하나님의 은총에 깊이 잠긴 날이다. 3년 전 그날이 있었기에 나는 지나온 3년의 삶을 축복의 선물로 향유할 수 있었고, 그날이 있었기에 오늘 푸르고 푸른 생명의 세계를 가슴 깊이 호흡하고 있다.

 

그러나 그날 이후부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면역 억제제를 복용해왔다. 남들은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데, 나는 면역을 억제하기 위해 하루에 두 번 12시간 간격으로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왔다. 왜냐하면 아들의 간이 내 몸에 들어왔지만 내 몸은 그것을 외부의 침입자로 인식하고 면역 체계가 이식한 간을 총공격하기 때문에 그걸 제어하기 위해 면역력을 억제시키는 것이다. 참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는 면역력을 약화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살기 위해 생명을 보호하는 면역시스템을 약화시키는 모순의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야 하는 것이 내 삶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면역 억제제의 부작용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퇴원하고 얼마 지난 후였다. 코 속의 털이 자라 뻗쳐 나온 것을 습관처럼 뽑아버렸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자 코가 텅텅 부어올랐다. 세수를 할 때 손이 닿기만 해도 아플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코가 부어올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몇 번을 반복하면서 코털을 뽑은 자리에 세균이 들어가 염증을 일으킨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면역시스템이 이겨냈을 테지만 면역억제제 때문에 세균의 공격을 깨끗이 물리치지 못하고 힘겹게 싸웠던 것이다.

밥을 먹을 때에도 곤욕을 치른다. 조금만 매운 것을 먹어도 콧물이 줄줄 나오고, 자칫 하면 재채기를 하게 된다. 찬 공기에 몸이 노출되면 금방 몸이 떨리고, 기침이 나오고, 콧물이 흐른다. 심하면 위턱과 아래턱이 붙었다 떨어졌다를 기계처럼 반복한다. 더위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더워도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땀이 흐른다. 몸이 어디에라도 부딪치면 비명 소리가 튀어나올 만큼 아프고 퍼렇게 멍이 든다. 코털 뽑힌 자리가 염증에 취약했던 것처럼 피부에 상처가 나면 감염의 위험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태양 빛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다. 뜨거운 태양 빛에 나가면 금방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검게 그을린다. 자외선에 노출되면 피부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평상시 먹지 않던 음식이나 조금이라도 상한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설사를 하거나 배가 아프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하루 종일 정신이 몽롱하다. 샤워를 하고 나면 항상 눈동자가 시뻘겋다.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기에 그러는 것 같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 양파를 갈거나 고추를 갈 때에도 눈이 매워서 견디지를 못한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눈을 뜰 수가 없이 아프다. 피곤이 누적되면 바로 입술이 부르튼다. 심했을 때는 입안이 부르튼 적도 있다. 이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부작용이 있다.

 

지나온 3년 동안 나는 면역억제제로 인한 몸의 변화를 여러모로 경험하고 있다. 몸이 전체적으로 외부 환경에 매우 민감해졌다는 것, 환경의 변화에 매우 취약해졌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동시에 몸의 면역시스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모저모로 조심하게 된다. 마음의 피로를 부르는 근심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육체의 피로를 부르는 과로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욕망을 절제하려 하고, 외부와 접촉하는 피부와 세균이 많이 활동하는 구강의 청결을 위해 신경을 쓴다. 손을 자주 씻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물론 매사를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 아니라서 아직도 여기저기에 구멍이 많이 뚫려 있다. 하지만 그래도 면역력이 약하다는 걸 일깨우면서 조심스럽게 생활한다. 그래서일까. 3년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생활했다. 감기 기운이 느껴진다 싶으면 잔뜩 몸을 웅크리고 감싼 탓인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비교적 건강하게 생활했다. 그저 위에 계신 분에게 감사할 뿐이다.

 

그렇다. 절제하고 겸허히 조심하면서 면역력이 약한 상태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을 때로 감사하기도 한다. 살기 위해 생명을 지키는 면역시스템을 약화시켜야 하는 심각한 모순을 크게 불편해하지 않으면서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약함이 곧 강함이요 유익일 수 있다는 진실을 체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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