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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성안수 논쟁

새벽지기1 2016. 7. 15. 10:59

[ 서창원 목사의 “여성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에 답함 ]

김세윤/ 풀러신학대학원 교수

남녀가 창조론이나 구원론적으로는 동등하되 기능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하는 판에 박힌 주장이 언어유희에 불과하며, 실제 성경의 여러 본문들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필자의 책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의 논지에 대한 서창원 목사의 반론 (「목회와 신학」 2004년 10월)에 답하라는 「목회와신학」의 요청을 받았다. 그것을 위해 필자는 서 목사의 글에서 먼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것들을 찾아 칭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런 것들을 찾을 수 없어 유감이다. 서 목사의 글은 필자가 늘 우려하던 대로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성경무오설이나 성경의 절대권위를 구호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성경을 제대로 보지 않고 그 대신 자신들의 화석화한 교리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 (즉, 자신들의 신학적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 경향을 잘 보여준 글이다. 이것도 공로/상급 신학과 사제주의적 목사 이해와 함께 한국의 보수 개신교가 중세 가톨릭교로 환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현상이다.

이상한 오해

서 목사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올바른 해석학을 동원하여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도그마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왜 필자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서 목사는 필자의 책 전체가 마치 여성안수에만 관한 것으로 착각하고, 심지어 필자가 이른바 만인제사장론에 근거해 여성안수를 주장하는 “무식”한 일을 한 것으로 내세우기까지 한다. 필자는 두란노서원이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이라고 제목을 붙여 출판한 책 (그리고 「목회와신학」 5월호에 그 책의 내용을 일부 간추린 상태로 낸 글)에서 남녀관계 전반에 대한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살피며, 교회 내에서 여성의 지도적 역할뿐 아니라 부부관계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논했다.

필자가 “만인제사장론”을 언급한 것은 여성안수 문제와 관계해서가 아니라, 요즘 한국의 다수 보수교회 목사들과 “가정사역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남편/아버지(만)이 가정의 “제사장”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조성하는 유교적 가부장적 가정생활이 비성경적이고 개신교 신학 전통에 어긋남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 목사가 왜 그런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되었을까? 혹 그가 여기에 자신의 “여성안수” 에 대한 공포심과 목사는 “제사장”이라는 자신의 사제주의적 신념을 투사한 결과가 아닌가?


필자의 책은 원래 두 시간짜리 대중강연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그 길이가 짧고 어려운 전문용어나 기술적인 세세한 논의를 피하고 쉬운 구어체로 되어있어 웬만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쉽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도 서 목사는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흔적들이 그의 글 도처에서 발견된다.

판에 박아 되풀이되는 “역할 차이”론의 허구.

필자의 책에서 남녀가 창조론이나 구원론적으로는 동등하되 기능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판에 박힌 주장이 언어유희에 불과하며, 실제 성경의 여러 본문들의 가르침에 어긋남을 자세히 논했는데도, 서 목사는 이러한 필자의 여러 논거들에 대한 점검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 판에 박힌 기능 차이론만을 언급하면서, 이제 “동등성”과 “평등성”이 다르다는 또 하나의 언어유희를 첨가하여 그런 주장의 허구성을 더욱 잘 드러내고 있다.


필자는 필자의 책에서 그런 성경의 진리와는 거리가 먼 언어의 유희가 한국인들의 가정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 여자를 굴종시키기 위해 널리 악용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워 좀 강하게 이렇게 썼다: “우스꽝스러운 현상은 그런 이른바 ‘역할의 차이론’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불이익을 당하는 여자들은 그 이론은 남녀동등이라는 신약성경의 기본 가르침을 헛되게 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며 속임수라고 거부하는데, 그 이론으로 이익을 보는 남자들은 그것이 남녀동등의 원칙에 합치하며 성경적이라고 우겨대고 있는 것입니다”(p.74). 그런데도 서 목사는 계속 남자의 기득권 보호 차원의 그런 우겨대기를 계속할 뿐 아니라, 심지어 “개혁교회는 교회에서 여성을 추호도 굴종시켜 본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항변하기까지 한다.

한국의 보수 개혁교회가 서 목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남성의 교회 내에서의 설교권과 지도력에 대한 독점을 옹호하고 여성의 설교와 지도력에의 참여를 불허하는 상황 속에서 여성의 굴종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서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의 여성들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하도 철저히 교육을 받아서(이런 것을 “세뇌교육”이라고 함) 그들이 당회 등 교회의 주요 의결과 치리 기관들에 참여도 못하고 가정에서 남편에게 순종을 강요당하면서도 스스로 굴종되고 있지 않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성경을 옳게 보게 된 서 목사가 졸업한 총신 여자 동문들 상당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필자에게 직접 확인해 주었다. 그러니 필자는 서 목사에게 제안하고 싶다. 한국의 여러 개혁교회들의 여성 전체를 대상으로 교회 내에 여성의 굴종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사회과학적 조사를 한번 해보시라고. 그것이 너무 번거로우면, 서 목사의 총신 여자 동문들에게만이라도 그 질문을 한번 해보시라고.

보수주의 목사들은 공의와 자비에 대한 의식도 없는가?

만약 어떤 목사가 자신은 한 교회의 목사로서 설교권을 비롯한 모든 지도권을 독점하는 가운데 자신과 같은 신학교에 하나님나라를 섬기라는 같은 소명을 받고 입학하여 3년이나 같이 공부한 동료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겨우 “전도사”로서 모든 점에서 열악한 대우를 받고 있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런 목사가 과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영을 제대로 받은 사람인가? 그런 목사는 분명 필자가 아는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고, 필자가 아는 예수의 정신과는 다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목사라는 사람이 저자 거리의 김 서방, 이 서방보다도 공의와 자비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보수 목사들은 차별받는 약자들에 대한 일반인의 의협심도 없는가? 과연 “목사”란 무엇인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성경에 계시된 “율법”이니 할 수 없다고? “율법”이 공의나 자비보다 앞선다고?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안 읽어 보았는가?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을 제대로 보라.

필자는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이 남녀 간의 “질서”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여자들이 교회의 공 예배에서 기도나 설교할 때 머리를 수건으로 가리고 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의도를 가진 것임을 강조하였다. 서 목사가 필자의 책에 이의를 제기한다면서도 필자의 책을 제대로 읽고 반론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유감이지만, 그보다 더 유감인 것은 성경을 제대로 보고 해석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고전 11장 2~16절의 문단 중 몇 구절들만을 문맥에서 임의로 추출하여 그들이 남녀 간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왜곡한다.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이 너무나 명백함으로, 그리고 필자의 책에 비교적 소상히 다루었음으로, 여기에서 길게 말할 필요가 없어 몇 마디만 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첫째, 그 본문은 남녀 간의 “질서”를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다. 둘째, 그 본문은 공교회의 공예배에서 여자들에게도 설교를 허용하는 본문이다. 셋째, 그 본문은 공예배에서 여자들이 설교할 때 복장을 단정히 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본문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제대로 보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다룸에 있어서도 서 목사의 성경해석에 있어 근본적 무지가 잘 드러난다. 필자는 그 본문이 사본학적으로 불안한 점, 고린도전서 14장 26~39절에 있어 문맥을 끊고 있는 점, 바울이 바로 앞서, 즉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에서 여자들의 교회내의 공예배에서 설교를 허용하는 가르침과 모순되는 내용,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과 그의 모범을 잘 이어 받아 표현하는 바울의 남녀 관계에 대한 전체적 가르침과 어긋나는 내용, 후대의 가르침인 디모데전서 2장 11~12절과 언어와 사상에서 유사한 점 등을 들어, 그 본문이 후대에 쓰여져 지금의 위치에 삽입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서목사는 이러한 논거들에 대한 정확한 점검과 비판이 없이, 자신의 영감설이라는 도그마를 들어 엉뚱하게도 그런 견해는 “성경의 정경론(에)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발언”이라고 하며 근본주의자들의 본능적인 방어기재에 호소하는 일만 하고 있다.


서 목사가 신학교에서 사본학이나 역사비평 등 성경의 깊은 연구에 필요한 방법론들을 터득하지 못했으면, 지금이라도 한국 교계의 공해인 엉터리 주석들 말고 학문적인 주석들을 참조하여 성경을 연구하기 바란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관해서는, 하다못해 「목회와신학」 2004년 9월 호에서 장동수 교수의 쉽고 명쾌한 사본학적 설명(pp.204~07) 이라도 참조하기 바란다.

이런 기본적인 성경연구의 훈련이 결여된 서 목사는 성경을 기록된 대로 역사적 정황과 언어 또는 문체 등을 분석(즉 역사비평)하여 신약성경의 남녀 관계 또는 여성의 교회 내에서의 지도적 역할 등을 다루는 본문들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해석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된 정확무오한 말씀임을 믿는다”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천명함으로, 또 “원본”만이 영감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원본”과 다른 “사본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본을 드리밀지 않으시고 계신다”는 등 논리의 일관성도 없는 주장을 펼치면서 논점을 흐리고 만다.

사본비평은 근본주의자도 환영하는 방법이다.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삼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20세기 초부터 바로 성경의 원본(만)이 영감되고 정확무오한 것이라고 보았기에, 성경의 많은 사본들을 비평하여 원본에 보다 더 가까운 성경본을 찾으려는 사본비평을 기꺼이 수용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무지하고 철저한 근본주의자들도 higher criticism 이라 불리던 역사비평은 배격하되 사본비평은 lower criticism 이라 하여 적극 수용하여 온 것이다.

다수의 보수 학자들이 참여한 사본비평을 통하여 후대에 바꾸어지거나, 삽입되거나, 생략된 문자, 말, 구절 등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져 오늘날까지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은 신학의 초보를 배운 사람들은 다 아는 바이다.


그런데 서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다른 이유들과 더불어 사본비평학적으로 봐서도 후대의 삽입절일 것이라는 판정을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성경의 “정경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다(서 목사는 정경론이 무엇인가를 알고나 하는 말인가?). 그래서 그는 명색이 신학을 공부한 목사라는 사람이 그러한 사본비평적 그리고 문서비평적 판단을 “성경의 편집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무슨 생경하고 위험스런 일이나 저지른 것같이 떠들어대는 무식한 자들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성경의 편집설”을 우려하는 자들은 성경의 책들을 좀 제대로 연구하여 그들 중 많은 경우 실제로 어떻게 편집되었는가를 배움으로써 그런 무지의 상황에서 어서 벗어나기 바란다). 서 목사는 그의 성경의 영감설과 무오설로 말미암아 사본비평을 받아드리는 근본주의자들보다도 더 철저한 맹목(盲目)주의자가 되려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본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본을 드리밀지 않으시고 계신”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사본비평이나 진지한 성경해석을 한번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사람이 만용을 부리는 헛소리이다. 성경에는 다양한 사본들로 말미암아 그 뜻이 크게 달라지고, 기독교 교리체계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는 구절들이 허다하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서 목사 같은 주장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감설, 역사비평, 그리고 디모데전후서의 후대성.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저자들을 자신의 영으로 영감하여 그들의 역사적 정황 속에 선포하게 하신 말씀들의 모음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감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들 속에서 인간의 언어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뜻을 정확히 터득하기 위해 우리는 사본비평뿐 아니라 언어, 문법, 수사, 문체, 문학, 또는 다양한 역사비평 및 사회과학적 비평의 방법들을 동원해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디모데전서 등 목회서신들은 바울이 직접 썼다고 보기 어렵고 바울의 신학과 신앙 유산을 이어받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그 유산을 자신들의 언어로, 자신들의 정황에 적용하여 쓴 문서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복음주의” 신약학자들 중 다수는 그들의 전래된 성경의 영감설에 대한 신념 때문에 목회서신들을 바울이 직접 쓴 것들로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난 30~40년 동안 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영감성에 대해서 좀더 성숙한 이해를 갖게 되고 성경의 영감성을 믿으면서 동시에 역사비평 방법론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터득하여, 목회서신들에 대한 위와 같은 견해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복음주의”를 빙자하여 역사비평을 거부하고 성경의 깊은 연구를 불가능하게 하는 거짓 보수주의를 극복하고, 그런 진정한 보수 복음주의적 학문을 꽃피운 사람을 하나 예로 든다면, 영국의 탁월한 신약학자로서 현재 세계의 복음주의 신약학자들의 “대부”라고 불러도 마땅한 하워드 마샬(I. Howard Marshall)이 제일 적절할 것이다.

그는 성경의 영감성도 믿기에 그것에 대해 좋은 단행본도 출판하였거니와, 최근에는 목회서신들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학문적 주석 (ICC)을 출판하였다. 그 주석에서 그가 목회서신들의 바울 저작설을 부인했다하여 그를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학자로 몰아대는 복음주의자는 적어도 영국과 미국에는 없을 것이다. 혹 그렇게 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더러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근본주의 신학의 한계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러한 호칭이 세계적 추세에서 보면 30~40년 전에는 합당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적 관점에서 볼 때는 아직도 역사비평에 대해 무지에서 비롯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한국의 보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들에게 합당한 칭호는 “근본주의자”이다.

근래에 구미에서 구약과 신약에 대한 깊은 연구로 박사학위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젊은 학자들 중 적어도 일부는 그들의 논문에서 역사비평의 방법론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론을 써야 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솔직히 인정한 일부 교수들이 근본주의적 동료들과 교단의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엄청난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신념을 그냥 숨기고 움츠리고 있는 경우들을 간혹 본다.

필자는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동정한다. 아마 그들 중 더러는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성경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헌신인가, 그리고 그것이 한국교회와 그들이 속한 신학교의 올바른 발전에 기여하는 길인가? 근본주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 실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그들에게 이렇다 할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서 비껴서있는 사람으로서 필자가 그들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한국 보수신학교들과 교회들이 근본주의를 벗어나 신학적으로 보다 성숙하고 바르게 되어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그들의 고충을 드러내주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한국의 근본주의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문서비평이나 역사비평 등의 성경해석 방법론들을 외면하고 근본주의적으로만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들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그래서 실제로 성경에 무지한 목사들만을 배출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이다.

마리아와 고린도교회의 여자들은 “공교회”가 아니라 사교집단에서 설교하였는가?

서창원 목사의 “이의제기”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가자. 서 목사는 필자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 여자들을 첫 복음 선포자들로 세우신 것(마 28:1~10; 눅 24:1~12; 요 20:1~18)을 중시하여 오늘 여자들에게 설교를 못하게 하는 것은 예수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논지를 편 것을 반박한답시고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장황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그의 문장들 간의 논리적 모순과 일부 성경의 사실들에 대한 주장의 그릇됨은 독자들이 이미 간파하였으리라 믿고, 다만 그가 마리아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린 것은 “공교회” 앞에서 설교자로 세움 받아 “공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니, 여자들은 “공교회”에서 설교하면 안 되고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하는 그의 주장의 문제점만 지적하고 자 한다.

이 주장은 당장 서 목사가 무엇을 “공교회”로 이해하며, “설교”를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의아스럽게 한다. 첫 부활절 아침에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공동체 외에 또 무슨 “공교회”가 있었는가? 그 공동체가 “공교회”가 아니면 무엇이 “공교회”인가? 신학교 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성도들도 설교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신약신학개론만 배운 사람도 사도적 교회의 첫 복음 선포(kerygma; 설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었음을 알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을 안다.

그런데도 서 목사는 마리아 등이 첫 부활절 날 제자들의 공동체 앞에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기쁜 소식을 알린 것은 “공교회” 앞에서의 “설교”가 아니라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는 그들을 “설교자”로 세움이 아니라 한다. 이런 신학적으로도 맞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뒤틀린 주장을 더 탓하여 무엇하랴! 다만 서 목사는 스스로 묻기를 바란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며 억지 주장을 펼치게 하는가?


서 목사는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을 제대로 보면 여자들은 “공교회”에서는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이 틀렸음을 감지하였을 것이다. 그가 반박한다는 필자가 그 본문을 중시하여 다루었고 그 본문에 근거하여 여자들에게 교회의 공예배에서 설교하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강조하였으니 말이다. 아마 그러기에 서 목사는 그 본문의 정작 핵심은 피하고 앞서 본 바와 같이 바울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그의 몇 마디에 호소하여 그 본문을 남녀간의 질서를 정리하는 것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서 목사가 필자를 반박하려면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전체를 직시하고 필자의 그 본문 해석이 왜 틀렸는가를 지적해야 한다.

그것도 하지 않고 그 본문의 핵심도 외면하면, 서 목사는 결국 자신의 도그마에 거침돌이 되는 성경의 본문은 무시해버리는 사람이 아닌가? 서 목사는 사도 바울이 세운 고린도의 교회를 “공교회”로 보지 않고 무슨 사교 집단으로 보는가? 서 목사는 고린도의 “사도적” “공교회”에서 여자들이 예언(요샛말로 하면, 설교)을 했고, 바울이 그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한 계속 예언하도록 허용했다는 것을 부인하는가? 그들은 “공교회”에서 설교를 하지 않고 어디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여성들의 예언사역.

서 목사의 성경 해석의 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신약 성경에 분명 여성들 중 선지자들이 있다. 빌립의 네 딸들이 그러하며 (행 21:9) … 그러나 빌립의 네 딸들이 무슨 예언을 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온 것은 남자 사역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이 사역자로 나설 이유가 특별히 없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서 목사가 어떤 학자들의 의견을 참조하였는지, 도대체 그 “전통적인 해석”이라는 것이 어디서 유래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런 해석을 하는 학자를 또는 책을 본 일이 없다.

아마 정신이 올바로 박힌 “학자”치고 그런 해석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을 하는 사람은 “남자 사역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이 사역자로 나설 이유가 특별히 없었던” 상황인데도 그 여자들이 예언의 사역을 감당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또 누가는 그들의 그런 불미스러운 또는 죄스러운 행위를 자신의 “사도들의 행적들”이라는 책에 기록해두는 미친 짓을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성령의 다분히 기계적인 성경 영감설을 믿는 듯이 보이는 서 목사는 이 해괴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성령께서 “남자 사역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이 사역자로 나설 이유가 특별히 없었던” 상황인데도 그 여자들이 해서는 안 될 예언의 사역을 하였음을 누가를 통하여 성경이 될 책에 기록되게 하셨는가? 신약시대 “예언”은 성령의 영감에 호소해 하였던 설교였다.


왜 성령은 이 여자들에게 영감을 주시어 해서는 안 될 예언을 하게, 즉 범죄하게 하셨을까? 한마디로 말해, 이런 우스꽝스런 “해석”은 초대교회에서의 “예언”과 “선지자”의 현상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신약의 본문 - 초대교회에서 여자들이 활발히 설교 활동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는 본문 -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고 여자는 설교할 수 없다는 자신의 도그마에 맞추어 “요리”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 것이다. 교회의 전통 (도그마 등)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는 중세 가톨릭 스콜라 신학에 반발하여 성경의 올바른 해석에 의해 교리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칙을 내세운 종교 개혁자들의 후예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신약교회에서 여자들은 리더로 활동하지 않았다.

서 목사는 신약교회에서 여자들을 장로나 감독직에 안수하여 세우는 예가 없음을 들어 여성의 교회 내에서의 지도자 됨을 배격한다. 그러나 그가 신약을 조금만 깊이 공부했더라면, 신약시대, 특히 바울 당대까지에 있어 교회들의 직제가 얼마나 미숙하고 비조직적인 상태에 있었으며 지도자 세움이 얼마나 카리스마틱한 것이었는지, 목회서신들에 나타나는 장로와 감독 세움은 거의 1세기 말에나 점차 조직화되어 가는 교회의 지도자 세움의 제도 확립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 등을 알았을 것이다.

또 서 목사는 요새 상당수의 학자들이 로마서 16장 1~16절에 나타나는 뵈뵈를 비롯한 여성 지도자들에 대해서 주목하고, 특히 바울이 여자 유니아를 “사도”로 부르는 것(16:7)을 중시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여성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율법이나 전통 등 신학 전반에 걸쳐 바울 이후 유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방 교회들까지 보수화하여 예수와 바울의 해방의 정신이 율법주의로 전환되고, 예수와 바울의 은혜의 복음이 행위와 공로의 신학으로 전환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행위 구원론과 율법주의가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 예외적 소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14세기 동안이나 대체로 지배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에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의 진정한 가르침을 새롭게 발견하여, 특히 예수와 바울의 가르침을 새롭게 깨달아 은혜의 복음을 회복하고 교회 개혁을 이룬 것이다. 예수와 바울의 은혜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여성에 대한 가르침도 율법주의적으로 왜곡되어 교회 내에서의 여성 리더십 불허는 최근까지 교회의 굳건한 전통이 되어 버린 것이고, 성경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예수와 바울의 은혜의 복음을 회복하여 신학과 신앙의 다방면에서 개혁을 이루었던 루터나 캘빈도 여성에 대해서는 예수와 바울의 정신을 제대로 천명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전능하셔서 문화적 양보를 하실 필요가 없었다.

서 목사는 필자가 예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여 새롭게 창조하고 모은 새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도록 하기 위해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2 족장들에 상응하는 “열둘” 제자들을 세움에 있어 여자들은 그 속에 하나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예수의 당시 상황에 대한 문화적 양보라고 설명한 것에 대해“어차피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인데 유대인들의 문화와 전통과 관습을 거역하는 일을 그 전능하신 분이 왜 못하였는가? 성령의 능력은 문화와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는다. 복음의 효과적인 열매를 위해 문화적 양보를 하셨다는 것은 신학자의 궤변이다”라고 강변한다.

이것은 공관복음서들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고, 그들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태에 대해서 진지한 연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자로서, 다만 역사적 예수의 실재와 긴밀히 연결시키지 않으면 도케티즘 (Docetism)으로 흐를 위험을 항상 내포하고 있는 전통적인 기독론적 도그마에서 출발하여 연역하는 식으로만 사고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서 목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거창한 연구는 고사하고, 마태복음 17장 24~27절만 제대로 읽었더라면 그렇게 스스로의 무지를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주장은 사도 바울의 목회와 선교의 실제, 그의 서신들에 있어서의 가르침들, 그리고 그 외의 신약의 책들의 가르침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공허한 주장인 것이다. 서 목사는 성경을 그렇게 중시한다면서도 바울의 선교적 원칙 하나를 천명하는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9장 19~23절도 읽어 보지 못했는가? 또 서 목사는 “열 둘”을 뽑을 때 문화적 양보를 한 예수가 왜 마리아를 복음의 첫 선포자로 세울 때는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며 필자가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아들로 대가 이어지는 것으로, 즉 가부장적으로, 사고하던 당시의 유대인들이 “열 둘” 중에 여자들이 끼어 있으면 그들이 새 하나님의 백성 (새 이스라엘)의 조상들이라는 상징성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그것을 피한 것과, 이미 예수로부터 여성에 대한 존중의 가르침과 행태를 배워 왔고 그들의 예수 운동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온 막달라 마리아를 잘 아는 베드로 등 예수의 제자들에게 그 마리아를 첫 복음 선포자로 세울 때는 그런 문화적 양보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자가당착인가?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적 성경관의 자가당착

서 목사는 필자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선언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적 표현인 반면에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에서 여자들더러 교회의 공예배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설교하라는 가르침은 상황적인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한데 반발하여, 후자도 “성경에 기록된 것 그 자체로만 해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진다. …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나누어서 말한단 말인가? 비본질적인 것은 소홀하게 다룬다든지 혹은 우리가 임의대로 혹은 우리들의 편리대로 각색하여 사용하면 된단 말인가?” 고 묻는다. 이런 질문은 해석학의 초보도 모르면서 문자주의적 성경 이해만 가지고 있으며,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그 사고가 기본적으로 율법주의적으로 고착된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다.

서 목사가 신약성경을 조금만 연구했더라도 예수님도 바울도 구약성경을 그런 식으로 다루지 않았으려니와, 바울이 주 예수의 말씀들도 그렇게 율법주의적으로 다루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며, 예수나 바울도 본질적인 것들과 비본질적인 것들을 구분하여, 예컨대 사랑의 이중 계명은 본질적인 것으로 다루되 음식이나 정결 따위에 관한 계명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다루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서 목사는 다시 한번 성경 자체가 실제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자세히 그리고 정확히 보는 것은 도외시 하면서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라는 자신의 도그마에 의존하여 성경을 외부로부터 정의하려 하고 성경의 사용 방법을 규정하려 한다. 그것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한 가지 궁금한 질문으로 서 목사의 자가당착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리라 본다. 그래서 목사는 그의 지론에 따라 그의 교회의 남녀가 함께 참여하는 공예배에서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에 기록되어 있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자들에게도 설교를 하도록 하는가? 하면, 그들에게 꼭 머리에 두건을 쓰고 하도록 하고 있는가? 아니라고? 그러면 그가 성경을 그렇게 “임의대로 혹은 [그]의 편리대로 각색하여 사용하면 된단 말인가”

2000년 동안이나 없었던 여성성직을 왜 이제 와서 주장하느냐고

서 목사는 또 이런 주장도 한다: “만약 여성성직 허용과 같은 중대한 사항을 지난 2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님께서 방치해 두시고 오늘날 누구보다도 똑똑한 일부 신학자들에게 발견케 하여 교회에 소개하라고 하셨다고 한다면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로 이해하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모순된 존재라고 말하는 불경죄에 빠진다. 더 이상 계시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미 주어진 신구약 성경 66권으로도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 자체가 모순된 논리를 담고 있음을 독자들은 이미 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얼마나 미숙한 이해를 담고 있는가이다.

많은 학자들과 더불어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여성의 남성과 동등함은 무슨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1900여 년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과 신약의 다른 남녀 복음 선포자들을 통해서 신약성경에 계시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성령에 의한 영감을 믿는 사람들은 그 성령의 성경 해석자에 대한 조명(illumination)도 믿는다. 성령이 지난 1900년 동안 교회의 남성 지도자들에게 신약의 그 계시를 잘 조명해주시어 그 진리를 이해하도록 하셨는데, 심장이 완악한 남성 지도자들이 그 조명을 무시하고 그 계시를 보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서 목사를 위시한 한국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주 예수께서 여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한 것도 평가절하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사도 바울이 여자들에게도 교회의 예배에서 설교하도록 하며 뵈뵈나 브리스길라 그리고 유니아 같은 여자 지도자들을 세운 것도 눈을 가리고 안쳐다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백한 계시를 온갖 구실과 온갖 혼탁한 논리를 다 들이대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아니라 전통에 호소하는 한국의 “개혁신학자”들

한국에서 스스로를 “개혁 신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서 목사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여, 교회 내에서의 리더십 행사를 남성에게만 허락하고 여성의 안수 또는 리더십 행사를 부인한 것은 교회가 지난 2000년의 역사에서 지켜온 전통이므로 이제 와서 여성안수를 부르짖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을 펴는 모양이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 가정과 교회 내에서의 여성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현금의 세상적 시류에 영합하는 것으로 낙인찍으려 하며, 시류와 관계없이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군사문화의 권위주의적 잔재가 아직도 대세를 이루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주로 구약에서 볼 수 있고 신약에도 일부 잔재가 남아 있는 이른바 “성경적 가부장주의”를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신들이 시류에 영합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의 정신을 따라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시류에 영합하고 있는지의 문제는 여기서 따질 여유가 없다. 그러나 하여간 시류와 관계없이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여성성직 참여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옳다.


그래서 필자는 필자의 소책자에서 남녀관계와 여성 리더십에 관한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두루 살핀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과연 성경의 가르침을 포괄적으로 연구를 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들이나 서 목사는 필자가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신약의 본문들을 해석해 놓은 글을 비판한다면서도 필자의 그 해석을 제대로 점검하는 일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대안적 해석도 내놓지 않으며, 그냥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공허한 구호만 되풀이 한다.

그들이 기껏 한다는 것이 주 예수께서 마리아를 첫 복음 선포자로 세우신 것을 담고 있는 복음서들의 본문들이나 여자들의 설교 활동을 보여 주는 사도행전 18장 26절, 21장 9절이나 그것을 계속 허용하는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같은 명백한 본문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그들과 모순을 일으키는 디모데전서 2장 11~12절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만 호소하는 것이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후대의 삽입절들이고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이 후대의 특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성경 영감설과 무오설에 호소하여 그렇지 않다고 우겨대는 것만으로 여성 리더십에 관한 자신들의 부정적인 견해를 “성경적으로” 성립시키고 반대되는 견해를 무효화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명백한 본문들은 무시하고 그렇게 불확실하고 문제 많은 두 본문들에만 호소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렇게 그들이 여성의 성직 참여를 불허한 교회의 지난 1900년간의 전통이 성경적이었다는 선입관에만 매달리면서, 그 전통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알기 위해 실제로 신약성경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등한시 하는 것이다.


그런 전통주의자들이 성경의 영감설과 무오설 및 절대 권위는 소리 높여 외쳐대면서 실제 성경을 제대로 보고 깊이 해석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는 역설은 필자의 책에서 뿐 아니라 이 글에서도 서 목사를 예로 들어 누누이 보여주었으므로 더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또 다른 쓰디쓴 역설 앞에서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언제부터 “개혁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성경을 무시하고 “2000년간의 교회의 전통”에 호소하여 신학 논쟁을 벌여 왔는가? 시류에 영합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성경은 제쳐두고 교회의 전통에 호소하는가? 또 그들의 논조대로라면 행위 구원론과 사제주의는 교회가 1400여년이나 지켜온 전통이었으니 그것들에 대항하여 16세기 초에 루터와 캘빈 등 개혁자들이 은혜의 복음과 만인 사제론을 주장한 것은 큰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닌가?

“개혁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이른바 “개신교 스콜라 신학”에 사로잡혀 성경의 책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메시지를 발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스콜라 신학 방법으로 짜 놓은 자신들의 “조직신학” 체계에 합당하게만 말하게 하는 우를 범하여 중세 카톨릭 신학 방법으로 환원하고 있음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일부 “개혁신학”을 한다는 학자들과 목사들이 마치 캘빈이 성경해석을 다 마쳐버리고 그와 그의 후계자들이 신학작업을 완성해버리고, 과거 화란과 미국의 몇 학자들과 국내의 모 박사들이 그 완성된 신학을 좀 더 갈고 닦은 것으로 생각하여, 우리는 이제 그 신학을 고수해야 하며 거기에 겨우 해설이나 각주들이나 달아 가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리하여 한국의 보수 개혁교회들의 신학과 신앙은 화석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여간, 일부 “개혁 신학자”들이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리더십에 관한 논쟁에서도 똑같이 성경의 가르침에 보다는 자신들의 전통 에 더 무게를 두고 그 전통에 근거해 성경을 “요리”하려 하는 것이다. 오늘 그런 “개혁 신학자”들의 그러한 논법은 종교개혁 당시 반개혁적 가톨릭 신학자들이 루터나 캘빈에 대항하여 썼던 논법이다.

가톨릭 신학의 전통 사상과 스콜라 신학 방법에 대항하여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개혁 교회는 항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개혁해가는 교회”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라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친 개혁자들의 일부 후예들이 이제 교회의 전통에 호소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새롭고 보다 정확한 이해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는 노력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이 이러하기에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저버린 그들이 “개혁 신학자”라 자처하며 그런 구호들을 지금도 외쳐대는 것을 볼 때마다 그 공허함, 아니 그 희극적-비극적 연극에 서글픔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여성안수 하는 교단들이 부흥하는가?

마지막으로, 서 목사는 과거에 교회 내에서 여성 리더십을 허락하지 않은 때에도 교회는 부흥했는데, 오늘날 여성안수를 하는 교단들이 그렇지 않는 교단들보다 더 부흥한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며, 교회가 여자들의 리더십 참여를 허락하여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들을 활발히 사용하게 하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리라는 필자의 견해를 반박한다. 물론 필자는 서 목사가 무엇을 진정한 교회 부흥이라고 보는지 모른다.

서 목사의 글은 전체적으로 율법주의적인 목회를 하면서 성경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못하고) 교회의 가부장적 전통을 고수하는 분으로 인상을 남기는데, 필자는 율법주의에다가 기복신앙 및 상급 신학의 요소를 가미하고, 신앙을 신비화시켜 이성의 건전한 비판 능력을 마비시킨 상황에서 원시적 성경공부를 제공하여 회중을 우중(愚衆)으로 묶어 두며, 구약의 제사장 제도에 호소하여 사제주의적 목사관을 주입시키고 유교의 가부장적 그리고 군사 문화적 권위주의로 몰아붙여 양적으로 크게 “부흥”하는 교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 은혜의 복음을 대체한 공로/상급 신학과 율법주의의 교회, 자유와 사랑과 화평보다는 속박과 갈등과 불안감 (anxiety; Aengstlichkeit)을 더 많이 가져다주는 교회,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순종 대신 맘몬 우상숭배를 더 북돋우는 교회, 섬김의 리더십 대신에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성공”하는 Sado-Masochism의 교회, 성령의 진정한 열매들 대신에 성령을 빙자한 미신을 조장하는 교회가 수천, 수만 명의 “신자”들을 모으고, 그런 교회가 수백, 수천이 있다 한들, 한국사회에 하나님나라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구원을 실재화 하는데 과연 무슨 힘을 발휘하는가?

필자에게는 복음을 이렇게 저렇게 왜곡하여 수를 잔뜩 늘린 교회보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고 교회 공동체의 삶을 복음에 합당하게 이루며,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성화의 삶을 살게 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들을 이루게 하며,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올바로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를 위해서는 교회에서 성경적으로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올바로 가르치고 실행하여, 성도들이 건전한 기독교 가정을 이루게 하고, 사회 계층적 차별이나 갈등과 마찬가지로 성적 차별과 갈등도 없이 모두가 각자 받은바 성령의 은사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모두가 모두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도록 하는 것이 여러 요건들 중 하나라고 본다. 이런 성경적 이상을 추구하는 교회는 한국적 문화 상황에서 수적으로 크게 “부흥”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런 교회가 작더라도 참다운 교회로서 한국사회는 물론 온 세상에 “언덕 위에 세운 도성”같이 빛나서 그리스도의 계시와 구원의 참다운 전달자가 되리라고 확신한다(마 5:13~16). 왜냐 하면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고 사도들의 가르침이며, 본질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맺는 말 : 신학적 성숙과 성경적 개혁

서 목사는 지금까지 다룬 것들 외에도 몇 개의 주장들을 더 한다. 그러나 그것들도 여기서 다룬 것들과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그의 성경에 대한 무지와 신학적 사고의 빈곤 그리고 기본적인 논리적 사고와 논증 능력의 결여만을 드러내는 것들이어서 더 다룰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아마 한국의 많은 보수 교회들의 목사들이 서 목사와 비슷한 견해, 태도, 경향 등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래서 원래 그의 글이 응대할 가치가 없는 것임을 밝히며 기껏해야 한 면 정도만 쓸려고 하였는데, 생각을 바꾸어 편집자의 주문량을 넘어가며 이렇게 길게 썼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도전 받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의 보다 핵심적인 면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야 할 상황에서 그것을 중단하고 이러한 유치한 논쟁에 여러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이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원천적으로 불리한 여건들 (handicaps)을 안고 작업해가야 하는 한 후진국 출신 학자의 서글픈 숙명임을 내내 한탄하면서 말이다.

필자는 서 목사 같은 한국의 보수주의 목사들과 신학자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하는 바이다. 그들의 성경 영감설, 무오설, 절대 권위설 등의 구호들을 지금과 같이 성경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연구를 훼방하는 도구들로 쓰지 말고 도리어 그것을 적극 북돋우는 동력으로 삼으라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리로 믿으면 복음을 더 바르고 깊이 터득하여 율법주의 등 모든 왜곡들을 극복하고 복음을 온전히 그리고 포괄적으로 선포하라고.

그들이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면, 근본주의적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라고. 기독론에서 뿐 아니라 성경론에 있어서도 사실상의 도케티즘(Docetism)의 이단에 빠지지 말고, 성경의 신적 영감성과 함께 인간성/역사성도 인정하여 역사비평등 유용한 성경 연구 방법론들을 동원하여 성경을 보다 바르고 깊이 연구하라고.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며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는 교회를 이루고 사역을 해가라고.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로서 그들이 즐겨 외치는 자신들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개혁 교회는 항상 개혁해가는 교회”(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의 구호들에 충실하라고. 이 두 원칙들에 충실하여, 이제 새롭게 터득하게 된 남녀관계와 여성 리더십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에 따라 성도들의 가정과 교회를 개혁하라고.


한국의 보수 신학교들은 언제나 근본주의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학생들에게 성경과 신학을 제대로 가르쳐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는 목회자들로 키워 내보내게 될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한 자유주의의 위험을 피하면서 근본주의를 극복하고 신학적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이 시대적 소명을 잘 감당하기를 간절히 빈다.

김세윤 | 2004. 11.

출처 :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자... 힘을 내자..
글쓴이 : RealRis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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