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이 세대에 효과 있는 설교는 심판을 전하는 설교뿐이다 / 프란시스 쉐퍼

새벽지기1 2016. 7. 5. 22:40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 부른다. 자기 백성을 보고 울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를 우리도 가져야 한다. 본래 오던 길에서 돌아선 교회를 보고 우리도 울어야 한다. 그런 교회를 따라온 문화를 보고서 울어야 한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에서 태어나 60대 초반에 애굽에서 죽은 듯하다. 전승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예레미야를 빈 통나무에 집어넣은 뒤 통나무와 함께 톱으로 켰다고 한다. 유다는 하나님과 그분이 계시해 주신 진리를 거역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먼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신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전할 메시지도 같다고 믿는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노라”(렘1:10). 순서를 눈여겨 보자. 먼저 강력한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한 다음에 긍정적인 메시를 전해야 했다.

 

기독교는 낭만적이지도 않고 나약하지도 않다. 억세고 현실적이다. 성경은 예레미야가 당대 사람들에게 외친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해 주는데, 나는 오늘날 교회가 진정으로 탈기독교 세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세상의 반응에는 놀라지 말자. 성경은 거역하는 교회, 거역하는 문화가 이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둔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의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며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1:18,19). 그리스도인으로 탈 기독교 세계에서 평탄하게 사역하기를 바란다면 그는 비현실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셈이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그런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도 그런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예레미야는 자기 문화가 하나님께 등을 돌린 다양한 방법들을 분석한다. 단지 형식적일 뿐인 신앙의 부적합성, 만연하는 교회의 배교 행위, 몇 가지 특정 죄악 행위들,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떠나서 의미와 안전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 등 여러 가지 잘못들을 부각시킨다.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렘6:20). 제사는 빈번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잘못된 동기와 잘못된 전제들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 달리 말해서, 백성들은 “여호와의 전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의 손을 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계시된 내 진리에서 일단 등을 돌렸으므로 너희 성전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너희가 등을 돌린 후에라도 성전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 세대도 다를 바 없다. 종교활동이 왕성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도 없고, 심판을 막는 데도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신 신학과 타협안들- 이른바 복음주의라는 데서도 심심치 않게 보는 성경에 관한 타협안들-은 종교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게 만드는 실질적인 것을 제거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외면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를 외면하면 그분께 드리는 예배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외견상의 종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그들은 할례를 받았지만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었는가? 할례는 진리 곧 하나님의 계시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다. 외적인 형식들 자체는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예레미야는 뚜렷하게 배교를 비판했다. 여기에 현대 교회가 종합 개념인 상대주의로 얼룩져온 우리 세대의 특징이 있다. 1930년대 이래로 교회는 갈수록 배교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는 것을 실제로 보면서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치 못한 일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배교에 관해 강력하고, 엄격하고, 심지어 충격적인 용어를 써서 말씀하신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렘3:1). 성경 전체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너는 나의 신부라”. 하나님의 교회가 이를 외면하는 것은 영적 간통, 즉 배교이다.

 

유대인들은 거짓 신들을 향해 떠났다.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렘3:6). 그릇된 신학에 착념하는 것은 거짓 신들을 향해 떠나는 것과 같다. 교회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명제적 진리를 외면할 때마다 교회는 간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렵혔거늘”(렘3:9). 그러므로 탈기독교 세계에서, 그리고 때로는 탈기독교 교회에서 어디에 배교가 있는지를 사랑으로 지적하는 것이 시급하다. 배교는 배교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혁과 부흥,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교회를 혁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상대주의와 종합에 너무나 쉽게 젖어들고 있으며, 반정립이 부족한 경향이다.

 

풍요로운 사회의 결과가 어떤지 주목해 보라.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그들은 풍요를, 죄를 짓는 데 사용하였다. 우리도 그와 같지 않은가? 풍요로운 미국과 북유럽의 종교개혁 국가들은 종교개혁의 믿음을 외면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살지고 두루 다니는 숫 말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짓는도다”(렘5:8). 지금 80년대에는 더 큰 도피를 위하여 약물과 알콜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탈기독교 세계에서 만연하는 죄를 반박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교회가 가져야 할 메시지에 관해 보여 주신 선례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

 

사람들은 절대 기준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으며, 점점 더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로에 대해서 신의를 잃고 위선적이 되었다. 플라스틱 문화, 플라스틱 교회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기억에 따라 단순히 행동하고 있다. 문화와 교회 양쪽 모두에서 위선과 추악함을 보기란 너무나 쉬우며, 우리는 그것이 현재와 같이 극한 상태에 이르도록 가만히 있지 말았어야 했다. 옳은 것들을 산출해 낸 토대가 사라지면 겉으로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고 해도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당대의 철학 속에서 진리가 해체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렘9:8). 정통 교회나 자유주의 교회나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회가 당대의 배교와 죄악들에 대해 강력히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세대의 어떤 혁신 운동도 외면하려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물을 내고 있다.

 

예레미야는 세상을 의지하는 것에 반대한다.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며 또 그 하수를 마시려고 앗수르 길에 있음은 어찜이뇨”(렘2:18). 우리 시대의 애굽은 세상과 세상의 영리함이다. 만일 교회가 세상의 방식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럴 듯한 말과 즉흥적인 것에 흠뻑 젖어있는 냉소적인 세대가 교회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가 없다.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뇨 네가 앗수르로 인하여 수치를 당함같이 애굽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라”(렘2:36). “너희는 세상의 도움을 기대하느냐?” 하나님이 물으신다. “실패할 것이다. 너희는 부끄러워할 것이다.” 상대주의의 세대 안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교회, 곧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는 교회, 새로운 신학이 종교를 단순한 심리학으로 변질시키는 교회는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정말로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기대해야 한다. 허드슨 테일러가 말하고 했던 것처럼, 주님의 일은 주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 가벼운 메시지였는가? “당신들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돌아섰으며, 회개하지 않을 것이므로 철저하게 멸망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당신들의 문화를 철저히 파괴할 것이다.” 예레미야서 전체가 이런 예언으로 가득차 있다.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한, 완전한 멸망, 완전한 파멸의 시간이 여러분의 문화 전체에 다가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허영의 시장으로 돌아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적한 본 번연과 같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돌아설 때, 도시는 파멸의 도시가 된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무더기를 만들며 시랑의 굴혈이 되게 하겠고 유다 성읍들로 황폐케 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9:11). 너희들은 지식과 진보하는 과학 기술을 신뢰하고 있지만, 그 지식과 기술이 너희를 파멸시킬 것이다. 시대적 용기를 가지고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듣기 전까지는 우리는 교회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가 없다.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노와 분과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이 성에 거주하는 자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치리니”(렘21:4-7).

 

우리 세대는, 인간이 하나님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빛을 발해 왔으나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돌아선 우리의 문화는 하나님의 심판대 아래 서 있다는 사실을 들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지만, 은혜라는 동전의 뒷면은 심판이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만일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면,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효과있는 설교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설교뿐이다.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2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