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성령론

성령세례(1) 성령의 세례와 중생

새벽지기1 2016. 6. 24. 06:41


1 장 성령의 세례와 중생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무엇인가를 받는 사람이고 계속해 받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참되게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크고도 넘치게 그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세례는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요, 그리스도의 초보(6:1)에 만족하는 것과 더 완전한 것에 나아가는 것의 차이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최대의 위험은 성경을 그들의 체험의 빛에 따라서 이해하려는 위험이다.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의 빛에 의하여 우리의 체험을 조사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과 경험과의 관계에서 첫 번째 위험은, 성경을 넘어가거나 혹은 성경에 배치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이다. 주관적 체험을 성경위에 놓는 것이다. 광신주의이다.

 

또 다른 위험은, 전통이나 교회의 가르침을 성경 위에 놓는 일이다. 로마 천주교 이단이 이런 일을 해오고 있다. 성경에 제시된 것보다 더 낮은 수준에 아주 만족하고 있는 위험이다. 열심과 광신주의를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판단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명백한 단계와 계단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이들, 젊은 자들, 노인, 은혜와 주를 아는 가운데서 자라 가는 것 등등의 표현이 있다. 요한은 세례 요한을 포함한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성령의 세례라고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원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고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을 떠나서는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 8:7에서 자연인과 신령한 사람과의 위대한 구분선을 긋고 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사람이며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믿게 되는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0,12)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셨고 우리 안에 비추시고 지식과 이해력, 곧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믿을 수가 없다. 모든 신자 안에는 성령께서 필연적으로 내주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전체 성경의 기본적 진술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다. 그는 성령으로 난 사람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 중생은 성령의 은밀한 사역이다. 그것은 체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은밀한 사역이다. 사람은 그에게 그 일이 발생했을 때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이고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성령으로 세례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저는 주장하고자 한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성령의 세례란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특수하게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이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고전12:13)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즉 구약성경의 성도들과 함께 후사가 된 시민이 되었다고 한다. 신구약 성경에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길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안에서 뿐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분에 대한 증거를 믿었다.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1:11)고 하셨다. 비록 세례 요한이 선지자들 중의 최종 선지자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특이한 하나님의 종이며, 그리스도인같이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은총들을 향유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7~39). 이런 방식으로는 성령이 주어진 것은 오순절날이었다. 사도들은 오순절 이전에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도 주님은 제자들과 세상을 분명하게 구분지었다. 부활하신 후에도 요한복음 20장에서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하셨다. 그렇지만 아직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는 못했다.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오순절날이었다.

 

사도행전 8장에서도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하니 성령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믿는 참된 신자들이었고 그래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는 못했다. 이 진리는 너무 중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편견이나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고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울의 경우도 예수님을 보았고 믿었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안수하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하였을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 받기 전에도 성령을 받을 수 있다. 물 세례와는 무관하게 성령의 세례가 있을 수 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너희가 믿을 때(흠정역은 믿음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한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 가정은 성령의 세례가 그들이 믿을 때에 거의 동시에 임했다.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고도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확증된 진리임이 분명 확실하다.

19:4,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그들은 참 신자,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러나 19:6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한다. 여기에서도 참 신자이면서도 아직 성령으로 세례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대적인 증거가 있다.

중요한 요점은 믿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선이 있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13-14에 나오는 마지막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믿은 후에:흠정역)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자만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 “믿어 -- 인치심을 받았으니--.”

여전히 똑같은 순서이다.. 믿는 일이 먼저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받는 일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같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자는 분명하게 구별되고 분리된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날 때 필연적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분명하고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을 피상적으로 스쳐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