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성령론

성령세례(2) 제 2 장 성령세례에 의한 확신

새벽지기1 2016. 6. 26. 09:41


2 장 성령세례에 의한 확신

 

요한복음 서두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상과 모형을 제시해 주며, 또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성령세례에 대한 교리를 이해해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며 핵심이 되는 것이 없다고 분명히 해준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 구원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교회는 죄와 치욕의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한 불경과 증오 그리고 적대감에 대해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 유일한 소망, 현 시대의 가장 긴박한 요구는, 교회의 부흥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개인 신앙의 부흥을 의미한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나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태어난 사람으로 성경은 그 사람 안에서 중생의 사역을 이루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면,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세례 받은 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중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 즉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본질적 특징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성경의 어느 한 부분도 어느 다른 부분과 대치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오직 옳은 견해는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의 양자를 다 취하는 것이다. 성경 어느 한 부분의 뜻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성경의 다른 부분을 희생시키는 것은 고등비평적 태도이다. 성경의 어떤 가르침도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그릇된 것이다. 우리가 읽는 모든 성경은 우리 자신들에 적용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개인과 또 기독교회에 기대해야 하는 모형, 즉 표준이나 규범의 일종이다.

 

기독교의 부흥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부흥을 정의하는 최선의 것은 교회가 사도행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즉 일종의 오순절의 재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성령이 교회 위에 다시금 부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하고 필수적인 교리의 부분이다. 사도행전 2장이나 그 외의 다른 어디서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이 기쁨과 행복 그리고 확신 및 신뢰에 차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교회사에 있어서 종교개혁과 부흥 등의 모든 위대한 시대의 특징이었다.

 

여러분 모두는 그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는 본질적 외침을 소유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또 그리스도와 더불어 기업에 참여한 것을 어떤 의심이나 반박 또는 불안이나 망설임 없이 믿고 있는가? 여러분은 충만한 확신으로 즐거워하는가?

 

믿음을 얻는 것과 믿음의 완전한 확신을 혼동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이고 위험한 일이다. 신약의 서신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그들 위에 부으심으로 기독교회를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는 성령세례를 받은 교회이다. 그리고 신약의 모든 교훈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와 같아야 한다.

 

여러분은 신약의 서신서들이 신자들에게 성령세례를 구하라고 권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데 왜 그런가? 그들은 이미 그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무시하고서 우리 주님의 교훈과 신약 서신서들의 교훈에서만 여러분의 가르침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위험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을 재삼 강조한다. 제가 주장하고 있는 강조점은 신약의 가르침에 따른 것으로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계속 교회의 역사가 중생과 성령세례와의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중생과 성령세례 사이의 이 중대한 구별에 대하여 최종적인 증거는 주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가 모든 의를 완성하시려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3:21-2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을 입어”(4:1)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성령에게 이끌리셨다”.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14).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4:17~18,21).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이 인치신 자니라”(3:24). 성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인치셨는데, 요단 강에서 예수님 위에 성령을 보내실 때 하나님은 그를 인치셨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1:13).

 

무엇 때문인가? 여기에 바로 결정적 요점이 있다. 거기에서 주님은 그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는 인간으로 사셨으며 목수로 일하셨지마는, 이제 서른의 나이에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여기에 이러한 교훈이 있다. 비록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이 되셨으며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사셨기 때문에, 그의 완전함 속에 성령 받으시길 원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주셨다. 성령이 그의 위에 임하셨다. 그때에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권능으로 나가셔서 전파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는 말씀하셨다. “나는 전파하기 위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성령의 능력을 부여받지 않고서는 구원의 복음에 대하여 증인이나 전파자나 증언자로서 활동하시지 않으셨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령세례의 목적을 보이고자 한다.

 

우리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비록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할지라도 인간의 형체를 지닌 즉 종의 형상을 지닌 메시야로서 그의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하여서 성령의 세례를 필요로 하셨으며, 성령이 그 위에 임하셨는데, 이것은 마치 제자들과 다락방의 120, 그리고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 위에 임하신 것과 같으며, 부활의 모든 때에 신도들 위에 임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그는 메시야적 사역을 완수하셨으며, 성령의 권능으로 말씀하시고 사셨으며, 무한한 성령의 능력으로 죽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

 

여러분은 다시 태어나는 즉 신적 본질에 동참하는 중생과, 성령세례와의 사이에 본질적 구별을 확고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난관에 빠지게 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께 일어난 사실을 납득이 가도록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