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교리강좌(2)

제 11 장 그리스도와 연합

새벽지기1 2016. 6. 16. 20:48


11 장 그리스도와 연합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

 

실체의 융합이 아니다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일종의 인격의 혼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연합을 우리의 실체 혹은 존재의 본질이 우리 주님의 실체 혹은 존재의 본질과 합쳐져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비주의자들은, 당신은 사라지고, 신성과 영원에 흡수됨으로써 당신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완전한 구원은 영원 속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여러분과 제가 영원의 끝없는 시간 동안 개인들로 존재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사라지거나 하나님께 흡수되어 합쳐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은 언제나 개인들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지극히 복된 광경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도 별개로 구분되어 있지만, 서로 결합되어 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다. 부분적으로는 인간이고, 부분적으로는 신적인 새로운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둘은 분리되어 있으며 또한 함께 있다. 물질적 의미에서 융합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도 실체의 융합이나 뒤섞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호감이나 흥미의 연합이 아니다

이 연합은 우연히 동일한 흥미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구성한 느슨하고, 일반적이고, 외적인 연합이 아니다. 베토벤 동호회 등등. 이것도 연합은 연합이다. 이것은 신비주의의 오류를 피하려다 나온 표현 방식이다. 우리의 연합은 이보다 훨씬 더 크고 더 깊은 것이다.

 

영적인 연합

성령에 대한 교리가 대단히 중요해진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은 성령의 기능, 특별한 사역이며,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임재에 의해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다. 물질적인 연합이 아니라 영적인 연합이다.

고전 6:16-17,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이라”“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 12:13,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신비적 연합

에베소 5장에서 바울은 주님과 그리스도인 신자 간의 연합이 남편과 아내의 연합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신비적 연합이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 하나의 연합이 있다. 신비적이라는 말보다 이 연합을 더 잘 묘사하는 용어를 찾을 수 없다.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될 뿐 아니라 그 둘은 친밀한 방법으로 묶여 있어서 둘이 정말로 하나가 된다. 이것이 신비적 연합이다.

 

생명의 연합

이 말은 우리의 영적 생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나온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이 생명의 연합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연합은 그야말로 생명의, 영적인 연합이다.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생명 일부가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받고 있다.

14:19-20,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일은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생겨 난다.

17:22-23,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

이것은 주님 자신이 주신 진리이다. 주님은 자기 백성이 이 생명의 영적인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아버지가 주님 자신 안에 계신 것같이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이것이 생명을 주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연합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유기적 연합

유기적이라는 말은 양방향의 통행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생명의라는 말과 차이가 있다.

즉 이 연합에서는 우리가 받기만 할 뿐 아니라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모두 능동적인 지체들이다. 몸의 각 부분은 몸의 생명에 대해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머리뿐 아니라 각 지체들도 활동을 하고 생명력을 지닌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기여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엄청난 개념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 놀랍고 고귀한 진리를 인식하는 것보다 더 우리의 믿음을 자극하고, 실제로 거룩해지도록 격려하고 자극해 주는 것은 분명 아무것도 없다. 저는 교회의 영적 수준이 이토록 낮은 주된 이유는 이런 교리들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주관적인 견지에서 생각하며, 뭔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는 나머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고 우리의 고귀한 부르심과 특권적 위치를 인식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개인적 연합

우리 모두는 각각 별도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우리는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에게 연결될 뿐, 개인이 직접 우리 주님과 연합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개인적으로 우리 주님과 관계를 맺으며, 우리가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오로지 이 관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동시에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에 속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올바른 순서는 우선 개인을, 그 다음 두 번째로 집단을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로 인해 난 것이 아니라-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가 아니다- 성령으로 났다. 이렇게 태어난 순간 보이지 않는 신비적 교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측면을 강조하도록 하자. 교회를 통해 주님께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주님께 나갈 수 있으며, 집단적으로만이 아니라 단독으로도 주님께 연합되어 있다.

 

분리될 수 없는 연합

연합은 단 번에, 그리고 영원히 이루어지는 일이다. 들어왔다가 나가고 들어왔다가 나가는 일을 반복하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분리될 수 없는 연합이다.

8:38-39,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 연합이 이루어지는 방법

 

성령과 믿음

연합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2:5) 살리신다. 그것이 연합이다. 그러므로 효력있는 부르심과 중생, 그리고 우리가 살펴 본 모든 일에서 주된 사역은 성령이 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 우리의 믿음이 작용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믿음이 이 연합의 중대한 부분이라는 사실도 강조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이 연합이 유지되고, 발전되고, 강화되도록 돕는다. 오직 믿음이 활성화될 때에만 이 연합과 우리의 중생, 기타 우리가 살펴본 모든 일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을 다루는 성경 본문에서는, 이 믿음이라는 요소가 필연적으로 강조된다. 성령은 연합을 이루시고 믿음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믿음은 점점 더 연합을 바라고 그 연합이 유지되게 한다. 믿음은 점점 더 주님의 충만하심에 다가가며, 우리가 연합의 진리를 더 많이 깨닫게 될수록 점점 더 그 충만함에 다가가게 된다.

 

연합은 교회나 성례를 퉁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교회가 없이는 결코 거듭날 수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바로 이 점에서 교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견해를 단호히 부인한다. 성경에는 이렇게 말하는 구절이 없다.

마찬가지로 연합은 성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합은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세례를 통한 중생을 말하는 어떤 가르침도 믿지 않는다. 또한 성만찬 의식을 통해 연합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성례는 연합을 유지하고 그 연합이 길어지고 커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을 자극하는 데에는 커다란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성례가 연합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3. 연합의 결과

 

객관적(언약적) 결과

주님과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몇 가지 일이 생겨나고, 이 일들은 우리의 지위, 상태, 신분에 영향을 준다.

 

언약적이라는 말은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용어이다. 본성상 우리 모두는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는 언약의 머리이다. 미국의 모든 주는 연방적 연합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모든 인류가 아담과 이와 같은 언약적 연합안에 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서 그가 행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된다.

아담이 범죄했기에 우리도 범죄했다. 그가 타락했기에 우리도 타락했다.

이것이 원죄와 원죄책의 교리이다.

 

그러나 이제 다른 한 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똑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이다. 6:6을 주관적으로 혹은 경험적 의미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객관적인 의미이다. 내가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했기 때문에, 그가 못박혔을 때 나도 못박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신다.

 

이 언약적 관계로 인해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믿어야 한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나 역시 죄를 범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나도 십자가에 못박혔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살아났다. 2;6을 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울은 지금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우리가 여전히 땅위에 있지만, 언약적으로, 그리고 이 관계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이 말씀 역시 분명히 언약적 진술, 법적 혹은 법정적 진술이다. 물론 이 용어들은 어렵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은 모두 어려운 법이다. 어렵다고 해서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진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이 일은 이미 일어났다. 물론 이 일이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면에서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구속되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칭의에서 바로 영화로 넘어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강조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한량없이 받으신 성령을 받는다.

 

이 연합의 다음 결과는 우리가 양자 됨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사항은 우리는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다. 그리스도가 상속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 상속자들임이 분명하다.

 

주관적(영적) 결과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제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7장과 요한일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후3:18)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된다는 것은 같은 의미다.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8:29)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이다. 물론 저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닮는 것을 말한다.

 

제가 강조하는 마지막 사항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그리고 심지어 그의 죽으심에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얼마나 위대한 사상인가? 1:24에서 다르게 표현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은 육체 가운데 있는 자신의 고난을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과 역경의 남은 것을 채우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신비적 연합의 결과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이와 같이 신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53:3)이셨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으며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및 연합을 가장 민감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이 고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의 고통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와 그들의 상실된 상태 때문에 정말로 고통을 받는다.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 때문에 우리는 주님처럼 영혼의 탄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자 구세주와 우리가 연합한 것의 주관적 결과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 성령을 통해 우리가 신자와 주님 간의 연합이라는 이 놀라운 교리에 눈을 뜨게 하소서. 우리가 힘을 다해 이 연합을 상세히 연구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며,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았습니다. 그것이 나의 상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와 연합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입니다.”라고 말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