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교리강좌(2)

제 9 장 새로운 출생

새벽지기1 2016. 6. 14. 08:28


9 장 새로운 출생

 

1. 중생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예화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의 결과로 사람들 사이에 부르심이 효력있게 된다.

부르심이 유효하게 되는 것은 이제 이 사람들 안에 자기들에게 주어진 이 영적 진리, 혹은 신적 진리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이전에 없던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생은 단순히 영혼의 기능 중 일부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람의 근본적인 성향의 변화로 규정했다.

 

성경은 우리가 "새 마음“(36:26)을 받았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마음이라고 할 때는 요즘처럼 단순히 감정이 거하는 곳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이 거하는 가장 중심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새 마음 혹은 청결한 마음이 주어지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제가 근본적 성향이라고 묘사한 것, 즉 다른 모든 것을 통제하고 결정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며, 변화는 바로 거기에서 일어난다.

 

중생 문제 전체는 분명 큰 신비이다. 그것은 기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바람에 비유했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8).

 

1) 접붙임 예화

가장 훌륭한 예화이다. 성경 자체에도 등장한다.

특정한 유형의 배를 키우기 원할 때 흔히 이런 방법을 쓴다. 키우기 원하는 자그마한 접붙일 어린 가지가 있다. 다음에는 흔한 야생 배나무를 골라 칼자국을 내고, 만들어진 상처에 어린 가지를 끼워 넣고 묶는다. 그러면 당신은 원하는 종류의 배만 열리는 놀라운 배나무를 갖게 될 것이다. 바로 바로 가지치기를 해 준다면 마침내 이 나무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좋은 배만 열리는 때가 오게 될 것이다.

 

새생명을 심으면 첫 단계에는 하나의 나무에 재배된 본성과 야생의 본성이 모두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 나무에 두 성품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옛 가지를 쳐내면 새 가지가 점점 전체를 지배할 것이며, 결국에는 여러분이 원하는 열매들만 생산하는 배나무가 될 것이다. 저는 이것이 중생에 대해 지금까지 사용된 최고의 예화라고 생각한다.

 

두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의 자아이다. 하지만 새 본성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의 지체를 죽이도록 부르심 받았다. 옛 본성에 속한 것을 계속해서 가지치고 억제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이 새 생명은 자라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새 본성이 점차 더 분명히 보이게 될 것이다.

 

중생에서는 우리 안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진리 혹은 사람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가 변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변화는 우리의 바깥에서만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린 배 가지를 배나무에 접붙이는 것만큼 분명한 변화이다.

 

2) 잘못된 예화

부지깽이의 예화

부지깽이가 불 속에 있는 동안에만 붉게 달궈지고 부드러워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에 대한 예화이며, 그 안에 거할 때만 새로운 생명, 새 삶의 방식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저는 이 예화가 중생의 교리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리스도인이며 거듭난 사람도 타락할 수 있다. 신비적 의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을 수 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거듭났다. 그들 안에는 새로운 원리가 있다.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변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이 이 변화를 충분히 보여 주고 있지는 않지만, 변화는 존재하며 이 사람들이 완전히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고 묘사해서는 안 된다.

 

구명대의 예화

구명대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물에 떠 있다. 구명대를 벗어 버리면 이 사람은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이 예화 역시 중생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변화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생의 교리는 이 변화가 단순히 주님과 우리의 관계 혹은 진리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어떤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 안에 심어진 새로운 생명이며, 삶과 순종의 새로운 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자라고 발전하여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우리는 영광으로부터 영광으로, 하늘나라에 이를 때까지 변화됩니다.”(찰스 웨슬리) 그 일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며 우리는 변화되고,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2. 중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

무엇보다도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1) 성경의 명시적 진술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재출생은 절대적으로, 전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그것을 볼 수조차 없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6:15).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새 사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는 히12:14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함은 단순히 여러분이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는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함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주를 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다. 이 거룩함은 중생을 통해 우리 안에 심어진다. 새로운 삶은 거룩한 삶이며, 거룩한 원리가 우리 안에 심어지는 것이다.

 

2) 성경의 암시적 진술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우리 주님은 자신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10:10) 오셨다고 말한다.

이 사실 자체가 중생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내가 그에 합당한 본성을 가져야 한다. 영적인 것이 있고 육에 속한 죄된 것이 있는데 그 둘을 결합할 수는 없다.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 영적으로 변해야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성품과 죄의 결과물인 사람들의 성품이 중생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내가 진리를 인식하고 소원할 능력과 분별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나는 중생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실은 나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육적인 마음을 갖고 있고, 그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래서 중생이 필수적일 뿐 아니라, 그것도 처음부터 필수적이다. 중생이 없이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중생이 일어나기까지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

 

3. 중생은 어떻게 생기는가?

 

1) 중생은 도덕적 감화가 아니다

이것은 진리의 도덕적 영향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복음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 영향력과 능력 아래 나아올 때 복음이 그들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자기들 안에서 위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것은 그런 변화가 아니다.

우리는 인격 저 밑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변화를 일으킨다.

 

2) 중생은 세례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라는 도구를 통해, 그리고 오직 세례를 통해서만 중생이 발생하고 성취된다고 가르친다. 세례 시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우리 안에 있는 도덕적 본성이 변하여 새롭게 된다고 한다. 루터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생을 세례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거듭났다는 증거를 보인 사람들이었다는 성경적 증거가 사도행전 한 곳에만도 수없이 많이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실로 그들은 거듭났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 그들이 새로운 출생의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표적과 인침으로 세례가 주어진 것이다.

 

4. 중생과 말씀과의 관계

 

1) 말씀은 중생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중생으로 심겨진 생명의 씨를 싹트게 한다.

중생이 말씀을 통해, 그리고 말씀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시사하는 많은 본문이 있다.

그가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8)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제가 중생이라는 행위와 출생을 구분했고, 둘 사이에 오랜 시간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위 두 본문은 모두 출생에 대한 것임을 말씀 드리고 싶다. 말씀은 발생의 행위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심어진 생명이 태어나게 하는 데에 사용된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향이라고 부르는 근본적인 부분이라는 점이다.

성향이 변화되고 올바르게 되었다면 말씀이 임했을 때 효력있게 될 것이다. 말씀은 결과를 내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6:65,“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청종하고 말씀을 들었던 것은 주님이 그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연 것은 말씀이 아니라 주님이셨다.

 

2) 구약의 성도들과 갓난아기들의 경우는 중생과 말씀의 관계를 확증해 준다

옛 세대와 새 세대에는 단 하나의 언약만 있다. 우리가 믿음의 자녀이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은 우리 조상이다. 우리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나라에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동서로부터 오는 반면 유대인들은 바깥에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3:28-29). 다시 말해 구약 성도들은 거듭났다. 다윗은 거듭났다. 그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었다. 족장들도 선지자들도 마찬가지다.

 

만일 그 구약성도들이 거듭났다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중생의 행위를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말씀이 아님이 분명하다 중생은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것이다. 그들을 다루고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셨다.

 

갓난 아기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이들과 갓난아기들이 하늘나라에 갔으며, 앞으로도 갈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이라 믿는다. 중생이 언제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면 갓난아기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물론 어린아이도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중생한다는 것이다. 중생은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각이 없는 갓난아기에게도 성인에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생명의 씨를 심으실 수 있다.

 

5. 중생은 잃어버릴 수 없다.

당신이 중생했다면, 언제까지나 중생한 채로 있을 것이다. 저는 이것이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생은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중생이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 자신이 행하시는 역사이며, 하나님의 역사는 영원하다고 말해 준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10:2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 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그는 중생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하나님에게서 끊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생명을 내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요한 일서의 다음 구절들을 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그런 사람은 계속해서 죄에 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왜 그런가?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즉 중생한 사람은 결코 죄의 삶 안에 거하지 않으며 거할 수도 없다. 일시적으로 죄에 빠질 수는 있으나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어떤 사람이 거듭났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시금석이다.

 

요일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그들은 중생한 사람이 아니었다.

 

6장과 10장도 그 사람들이 중생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고 대답해 드리겠다.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그들이 거듭났음을 말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생한 사람은 그 안에 거한다. 죄에 빠져 타락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으나 그 안에 거한다. 생명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없다면, 그는 거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은 스스로를 나타내고 자신의 존재를 증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