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교리강좌(2)

제 6 장 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새벽지기1 2016. 6. 10. 07:26


6 장 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1. 성령의 일반적 사역에 대한 보충사항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 그분이 진실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분이며, 선지자이자 교사이자 하나님의 계시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라는 최종 증거이자 표시가 된다. 성령의 임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 준다.

 

2. 외적 부르심에 대한 상반된 반응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반적 부르심이 주어졌지만 그 반응은 달랐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1) 펠라기우스주의

원죄란 없다. 사람들은 일종의 중립적 상태에서 태어나 살아가며, 모든 사람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선이나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거나 거부할 능력이 있다. 성령은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

 

2) 반펠라기우스주의

성령은 사람들을 도우시지만 사랑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생겨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소망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도우신다. 펠라기우스는 너무 극단적이었다. 사람들 스스로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이 이런 소망을 나타내면 성령이 도우실 것이다. 일종의 협력적 은혜를 가르치고 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진리와 구원의 지식에 이르도록 우리와 협력하여 은혜로 도우시는 것뿐이다.

 

3) 아르미니우스주의

이것은 17세기 초 네덜란드 사람인 아르미니우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의 위대한 제자 중 한 사람인 존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아르미니우스는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그렇게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어서 성령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받아들여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분량의 은혜를 주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그 은혜에 협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부만 그 능력을 사용하기로 선택하고 나머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사람이 먼저 소망하면 성령이 와 그를 돕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적 견해는 사람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고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소망하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성령과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협력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4) 루터파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중생의 초기 단계에서 은혜 역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은혜에 저항하면 그는 불신자로 남아 정죄를 받는다. 저항하지 않으면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파는 사람에게는 능동적으로 협력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거부할 능력이 있다고 한다.

 

5) 개혁주의적 견해

사람은 역시 전적으로 부패했고 완전히 무력하고 무능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멸망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성령이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시지 않는 일을 구원받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신다고 한다. 선행적 은혜, 즉 사전에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여 그들이 믿도록 하는 은혜를 말한다. 이 견해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모든 일에 앞서는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타락의 교리를 바로 이해하면 개혁주의적 견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 교리를 다룰 때는 우리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며 우리 자신의 개념이나 철학에 너무 이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이해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도 있을 것이 분명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도, 루터파도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고, 구원의 길 혹은 과정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믿음을 강화시켜 주고, 확신을 세워 주며, 앞으로 주어질 복된 소망의 확실성을 알게 해주는 것은 없다.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4:14)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서 교리를 연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잘못된 교리를 믿는 이유이다. 조만간 그들은 최신 사이비 종교나 이단을 따라가게 된다.

 

3. 구원의 순서

 

구원 받을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면 성령은 어떤 순서에 따라이 사역을 행하시는가?’ 성경 자체는 어떠한 정확한 순서도 제시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구절은 로마서 828-30절이다.

(8: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 다른 본문은 행26:17-18이다. 루터파는 즐겨 이 구절을 사용한다.

(26:17-18)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구원의 순서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 두 사람도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기가 매우 어렵다.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순서를 전혀 다르게 제시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발생한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요한 방법이 있다. 구원의 순서를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 , 거룩하심 가운데 타락의 결과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며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고 계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와는 정반대 되는 것으로서 시간에 따라, 즉 이 일들이 시간과 경험 속에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 사고하는 것이다. 아니면 이 순서를 순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어서 주관적인 관점을 취해서 접근할 수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 역시 타락에 대해, 그리고 타락의 결과 죄 가운데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그 교리에 따라 여러분 나름대로 구원의 순서를 정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유용한 영적 훈련이 되리라 생각한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칭의, 중생, 믿음, 양자됨, 회심, 성화, 견인.

주관적 요소를 더 강조하면서도 신학적 순서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효력있는 부르심, 중생과 믿음, 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회개와 회심, 양자됨, 성화, 견인.

순전히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죄의 자각, 회심, 믿음, 칭의, 중생, 양자됨, 성화, 연합과 견인.

 

구원의 순서를 다룰 때 주의 할 점


시간적 요소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 요소들이 서로 대단히 엄격하고 기계적인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며 언제나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시간에 제한 받지 않기 때문이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움이 발생한다. 구원의 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문제지만 반드시 탐구해야 한다. 한가지 순서가 다른 것보다 필연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고찰하고 파악해 나가면서, 그 순서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자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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