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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23 (엡2:11-13)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5. 17. 06:46


성경: 엡2:11-13절

 

1.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장애가 있는데, 그 첫 번째 장애는 죄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이에 있는 장애로서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그들의 위치와 상태입니다.

 

이 두 번째 장애는 옛 시대에 있어서 세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라는 두 주요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 둘 사이의 화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떠한 말이든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서로 함께 하나가 되어 무릎을 꿇고 같은 하나님과 같은 주님께 예배하고 경배한다는 일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으로만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전달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숙고하고 있는 11절을 살펴보면 바울은 그들이 전에 “육체 안에 있는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서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문자 그대로 확실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로서 할례를 받지 못했으며 “육체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로는 분명 이방인 이었고, 유대인이 가진 표적과 상징을 가지지 않았으며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함으로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한 가지가 육체 안에 있는 표증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할례 자체의 목적마저도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의 이 큰 장애물과 거침돌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육체의 차원에서만 말하는 이 사람들, 오직 사람의 행한 그 일만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차원에서만 생각함으로서 자신들을 따로 떼어서 “우리는 할례당”이라고 말했던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무 할례당”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율법적인 문제는 우리 주님에 의해서 해결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육체의 표징이 분쟁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고대세계가 우리에게 보여준 방식 그대로 동일한 문제들로 인한 분쟁과 쟁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떠한 제도나 방법들을 모색하며, 대화로, 혹은 글로서 수 없이 해결해 보고자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복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이방인이나 유대인, 또는 종이나 자주자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었듯이 오늘날에도 진리는 변치 않고 오직 복음으로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은혜와 같은 긍휼과 같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것들을 받고 함께 누리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는 같은 분을 경배하고 있으며 같은 구원을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이후의 나의 충성은 내 자신에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충성도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향함으로서 우리는 같은 지향 점을 가지고 서로 질투와 시기와 분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오히려 다함께 그에게 가고 그에게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일을 해내는 그리스도의 방식입니다. 참된 평화에 대한 오직 유일한 소망은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신 그분의 발 앞에 함께 모이는 것이라는 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제 12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는 두 번째 국면 곧 어떻게 이방인들인 에베소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고서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가능했으며 어떻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새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데 동참했는가를 상세하게 살펴보게 됩니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과 할례의 표를 소개해 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신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일을 너무 작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속에 분명히 해야 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 점에서 잘못 빗나가 외적인 표증만을 의미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할례가 육체에 있는 것이며 외적인 것으로, 사람이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어 모든 것이 잘 된 것이고, 할례를 받지 않았으면 모두 잘못되어 소망이 없다는 식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롬2:29의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니라.”말씀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은 이 할례의 전체 목적이 하나님 의중에 영적인 것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거나 인식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약속의 언약들 또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셨던 소망, 그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해 있던 조건과 지위들은 아주 특별했으며, 그 외의 모든 나라들은 이 축복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존재의 유무의 차원에서 그 모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행하신 모든 일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약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있는 것들을 그 자체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된 믿음의 때까지 갇힌”(갈3:23)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으며,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교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후에 많은 자손을 낳았습니다. 땅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기까지는 전 세계와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나라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까지 하나의 중요한 의미로 볼 때 구분이 없었지만, 이미 가인의 노선과 셋의 노선 사이에 일종의 구분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시기까지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다루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시초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할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다른 한 편에는 이방인들로 구별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서 그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 동일한 시민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성도와 동일한 후사들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해 놓으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고”,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으니 그 보다 더 악한 것은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만큼 더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오직 두 가지 입장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을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소망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속이며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새롭게 주어지는 새 생명을 가지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다면 즐겁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천국이며 영원한 행복을 미리 맛보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가까워짐


사도가 쓰고 있는 서신의 주제는 “믿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연약하고 작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눈을 밝히사” 우리가 이것을 진실히 알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위대성을 이해하려면 첫 번째로 구원 밖에 있는 우리의 조건이 어떠한 것인가를 인식해야 하고, 두 번째는 구원의 결과로 인해서 되어진 우리의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12절에서 묘사된 구원을 떠나 있던 우리의 조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 누가 되었든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상, 죄의 결과로 인해서 도저히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위대성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더 예리한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구원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이 순간에 당신의 삶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사실을 더 자랑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 만일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그것이 전부가 됩니다. 그것에 비교할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특권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지위의 영광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13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독교 신앙의 가장 영광스럽고 감동적인 요약 가운데 하나를 대하게 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것이 전체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이전에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선한 삶을 살았든지, 악한 삶을 살았든지, 그러한 조건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떠한 토양에서 자랐든지, 얼마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든지 그러한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 가정에서 훌륭하게 양육을 받았든지 그렇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서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아무렇게나 살아왔든지 그러한 것들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워졌는지, 내가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 왔는지, 그것이 문제일 뿐 다른 어떠한 조건들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가까워졌는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확신과 신뢰감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교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의 모든 복락들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4. 그리스도의 피


우리는 구원의 위대성을 이해할 때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되어 찬송과 감사로, 그리고 흔들릴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신과 신뢰로 인도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졌으며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된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됨됨이나 행위의 결과들로 인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의 선함과 우리의 도덕성을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공공에 기여하는 사람들, 삶에 있어서 존경을 받고 선행을 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큰 희생을 치루면서 자기의 큰 소유를 포기하고 가정의 안락을 희생하는 사람들, 이들은 확실히 선한 일을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님께 열납되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열심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언약마다 피로 인이 치셨고 그 피로 보증되어졌습니다. 구약을 읽어 보면 그것을 어디서나 발견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과 성구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성별되었고 하나님께 봉헌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피를 뿌림으로서 인쳐 졌고 비준되었습니다.

 

새 언약도 같은 방식으로 비준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에 나아갈 때에 경외심과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들어간 것이니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