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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21 (엡2:4-7) (2)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5. 12. 11:10

성경: 엡2:4-7절 설교(2)

 

3.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절망과 낙담 속에 빠져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이 놀라운 진술을 계속해서 생각해 볼 때에 이 본문의 말씀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진술만큼 그리스도인에 관한 진리에 대하여 결정적이고 놀라운 진술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고통의 거의 대부분은 죄의 깊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과 다른 한 편에서는 우리 구원의 높이와 영광과 위대성을 인식하는데 실패하는데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영광스러운 일의 중요성을 알지만 그렇다고 구원을 죄사함 받는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그것에서 멈추어 버리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죄의 깊은 함정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 보좌에 까지 높이신 그 위대한 높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비극적인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구원 받는 방식에 관해서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그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가를 알기 원하여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됨으로서 이루어지며, 그것이 인도하는 첫 번째 요점은 중생이라는 사실을 지난 장에서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실에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일으키셨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실 때 육체적으로 일어났던 일이 영적으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일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사건 이후 사흘 동안 무덤에서 죽음의 상태에 있었고, 곧 그 사망의 상태와 장소에서 벗어나셨으며, 더 이상 죽음을 보지 않으시고, 더 이상 무덤에 머물러 계시지도 않았으며 40일 동안 택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때때로 여러 경우 또는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이 택한 증인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신 다음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바로 이러한 방식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존재하고 계셨던 영역 속에서 이러한 완전한 변화가 있었는데, 주님은 살아나실 뿐 아니라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께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이 동일한 능력이 믿는 우리 속에도 역사하고 있어서 우리 안에서 이 놀라운 사역을 행하고 있다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영적으로 죽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다는 것과 우리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는 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형벌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로 죄의 영역에 속해 있어서 죄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죄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전에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들로 그 자체를 드러내는 육체의 욕심에 의해서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거기에 속해 있지 않는 것은 그 죄의 체계에 대하여 죽었으니 우리가 더 이상 거기에 속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전에 했던 방식대로 죄와 허물 안에서 행하지 않으며, 율법의 사망의 체제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체제에서 벋어났기 때문에 그들과의 싸움은 불가피합니다. 우리가 육체 안에서 그 싸움에서 질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죄의 소유물이 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 전투에서 패했을 뿐입니다. 나를 대표하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계시는 한 우리는 수 없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에 살던 육체의 본성들로 인해서 죄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께 저질러지는 은혜에 대한 배역일 뿐 그것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실패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고 있으며”, “새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시간에 의해서 정해진 한계를 결코 넘을 수가 없으나 우리는 그 시간을 넘어 영원한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실패를 할 수는 있지만 영원의 세계에 비할 때 이것은 너무나 적은 일에 불과합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새 마음의 표증”은 이제 새로운 소원으로 나타납니다. “의에 주리고 굶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 이와 같이 성도의 최대의 소원은 보다 더 즐거워지는 것이나 순간적인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말처럼 “하나님이여 내 마음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소원합니다. 자기 속이 정결하기를 원하며, 거룩하며, 순결하며, 의로우며, 죄로부터 벗어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슬퍼하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귀찮은 것이나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죄 때문에 가지는 슬픔은 독생자를 내 주시기까지 하며 자기를 그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범죄한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은 기도를 위한 소원을 가집니다. 그는 하나님과 친밀해 지기를 어찌나 바라든지 어떤 다른 것보다 하나님과 대화할 시간을 곧 교제를 가지게 될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변화되어 새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의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행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즐겁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의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어떠한 것을 소원해야 하며 나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뜻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소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과 이지가 달라진 것입니다.

 

4. 하늘에 앉히사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고 일으키심을 받아 새 생명 가운데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무한정으로 땅에 남아 있지 않으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영광 중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연합되었으니 당연히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영적으로 우리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하며, 필연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이 모든 진술은 과거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장차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리심을 받았고 일으키심을 받았으며, 하늘에 앉힌바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 관한 진리 가운데서 최상의 진리요, 가장 높은 영광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해당되는 가장 값진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어”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매여 있지도,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살지도 않으며, 그 체제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는 일”에 의해서 통제를 받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하고 있는 일”에 의해서 통제를 당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의해서 조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의 자녀들에 관해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외국인이나, 순례자나, 여행자에 불과합니다. 베드로 전서 2:11~12에서는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 곧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은 이전의 그의 삶의 기억들을 이용하여 그를 유혹할 수가 있지만, 그들은 언제나 세상 밖에 있다는 것을 의식합니다. 이전에 세상 안에 있었던 적이 있었기에, 세상을 되돌아보고 세상의 향수를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참으로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영역에서도 벋어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통제에 있지 않으며, 성령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우리는 언제나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그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은혜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시작된 영광을 보게 되며,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승리하시고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졌습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흔들림이란 있을 수 없이 확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고 완전합니다. 우리는 그 안식을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의심하고 좌절하고 넘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서신에서 이렇게 강력하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땅의 것을 보지 않고 하늘의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기 때문에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해놓으신 일에 대한 것, 즉 우리가 절망적인 죄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일으키사 새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하늘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존재들을 위해서 왜! 이 모든 일을 하셨는지, 그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는”이라는 말로 답변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제일 되는 목적과 의도와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말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을 다른 방법으로는 전혀 행할 수 없는 특수한 방식과 방법으로 이루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반박하거나, 방해 한다거나 하나님의 성품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구속의 운동과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은 자신의 영광과 위대하심과 자신에 관한 진리를 선언하고 명백히 변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모든 것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스러운 성품을 밝히시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를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관대 그의 영광과 지혜와 사랑과 자비와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하늘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한 계획 속에 나를 선택하셨는가? 라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6.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라는 이 말 안에는 기독교의 전체 교리가 다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귀한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뺀 기독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께 축


복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 어떠한 치료를 받는 것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전체의 진수는 하


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만이 사람을 다루시고 사람을 축복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


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의 생명 보다 더 귀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뺀 우리의 생명이란 도대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명과 우리의 모든 축복과 힘과 그 모든 것들이 다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로부터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몸입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떠나 있다면 살아있다고 하는 생명조차도 사실은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며, 그것은 오히려 죽음보다도 더 비참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그 보다 더 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머리가 되실 때에라야 우리는 참 생명에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 보좌를 잠시 떠나서 자신이 만든 피조 세상에 내려 오셨고,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난과 역경, 그리고 모욕을 감수하시면서 까지 그 모든 일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 2위의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당하실 하등의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우리 주님께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