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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20 (엡2:4-7) (1)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5. 10. 07:03


성경: 엡2:4-7절(1)

 

1. 세상을 향한 기독교의 메시지

우리는 에베소서 2장의 처음 세절에서 본질상 우리가 어떤 존재들이며 세상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지 않고는 인류의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의 성품, 본성, 그리고 인간의 존재로부터 출발하였으니 이제 인간이란 어떠한 피조물인가 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합니다.

 

만일 사람이 약간 더 교육을 받고 지식이나 정보를 조금 더 필요로 하는 사실상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라면 분명히 문제를 치료하는 것이 쉬워질 것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회문제나 사람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어떤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며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세상의 이론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소망이 없는 처방이 되어, 이것은 순전히 시간 낭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성경에서 출발하여 죄 안에 있는 사람에게 무엇이 진리이며, 사람이 본질상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상태에서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탐색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있고, 마귀의 강력한 영적인 힘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정신과 사고방식들은 모두 마귀의 지시를 받아 결국 악한 권세에 의해서 죄와 허물의 삶을 영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아담의 본성으로부터 물려받은 오염된 본성으로 출발하여 끝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사람이 실패한 것도 욕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첫 번째 요인으로 인간의 욕심을 꼽을 수 있습니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국가와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온통 개인주의나 단체주의의 이기적인 욕심이 사회를 관통하여 작용하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싸움도 일어나고 전쟁도 하게 됩니다. 세계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를 영웅시 하지만 전쟁을 통한 승리도 실상은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라는 말씀이 이 세상일들이 어째서 그런 모양인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줍니다.

 

 

두 번째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계속해서 악한 권세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는 한 세상은 계속해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의 상태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한 장래의 역사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우리 세대에서 일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바로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감에 넘치는 자연인의 낙관적인 생각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을 사는 세상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은 실패를 했지만, 현대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보다 더 많이 진보되었고, 앞으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악한 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욕심에 의해 통제를 받는 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말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전쟁이 있을 것이고 전쟁의 소문이 들릴 것이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눅17:26~30)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의 역사관에 대한 교훈을 받은 우리는 즉각적으로 거짓된 열광과 거짓된 소망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교훈과 교육, 그리고 새로운 조직을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의 상태를 낙원처럼 바꿀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 복음의 특별하고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받아야 하며, 그것은 오직 기독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첫째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는 자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민족주의를 반대합니다. 우린 옳고 너희는 그릇되다 라든지, 유대인의 민족주의와 같은 것들을 반대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가 없게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입장입니다.

 

둘째 말할 수 있는 것은 용기와 힘에 의한 영웅주의나, 아니면 희생의 정신과 같은 요소들이 내포 되어 있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강조하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것들을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기독교의 메시지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일관하셨고,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 낮아지시고 십자가의 고난까지 당하셨습니다.

 

셋째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는 세상을 향하여 기독교의 원리를 실천에 옮기라고 호소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산상 수훈과 같은 것들을 지킬 수가 없으며, 그들은 “욕심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실천할 능력이 없습니다.

 

복음은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심판에 관한 것이고,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진다면 기독교가 세상을 향하여 어떻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선포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권면 밖에 다른 메시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신세계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하셨다고 말씀하시며, 또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은 “하나님께서 죄와 악의 권세를 통제”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여러 민족으로 구분하셨으며, 국가와 정부가 있도록 하셨고, “권세”를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한계를 두시고, 악에도 한계를 두셔서 제한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은 이미 지옥일 것이고 벌써 오래 전에 스스로 멸망을 불러와서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에 대하여는 이렇게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시민이 될 수가 있고 그 나라로 들어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감격적인 뉴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그 육신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실상은 그곳을 뛰어넘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열려진 나라는 영적인 나라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요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영원토록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그러나 하나님께서”라는 메시지의 가르침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성도는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소망을 두지 않고, 애정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놀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참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대하여 넉넉히 이기도록”하는 능력과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한다고 할지라도 “자기는 하나님의 장중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여 두렵지 않습니다.

 

그는 장래에 어떤 영광스러운 날에 그의 몸이 새롭게 되고 영화롭게 될 것임을 알므로, 이것을 소망하며 영원토록 즐거워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이며 곤고하고, 불행하고, 혼돈되고, 좌절하고 있는 현대의 세계를 향해서 해야 할 말입니다. 우리 성경의 본문에는 “그러나”라는 말씀이 빠져 있지만 사실 이 말의 중요성은 이제껏 나눈 모든 말씀이 “그러나”라는 말씀 안에 다 내포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에 풍성하심에 따라 이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구절은 특별히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절망과 소망 없음으로부터 복음의 소망과 의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소개하는 “그러나”라는 말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위대한 강조점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어 있어서 아무런 소망도 없는 조건에서 정말 예기치 않은 놀라운 방식으로 다른 영역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이 메시지가 와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의 풍성하심과 우리를 향하신 위대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진수는 죄를 용서받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 앉히시는 영광스럽고 위대한 일들을 계속해 나가시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객관적인 관점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하늘 보좌의 영광의 자리로 올라 가셨으니 우리도 죽은 후에 부활하여 그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받아야 할 미래의 사항으로 미루어 놓고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진리이며, 우리가 죽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살게 될 것이며, 우리의 몸이 영화롭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진술하고 있는 논리는 그것에서 멈추지를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미래에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제 그리스도인들의 지위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그의 전능하신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그 전능하신 능력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이해의 눈이 밝혀져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을 위해서 하고 계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래에 하시려는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시고 계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현재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에 대하여 결코 변개 될 수 없는 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으로 연합이 되었으니 우리는 살아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죽어 있었으나, 이제는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남을 통해서 이제 죽는 일에 대해서 끝이 났으니 우리는 더 이상 죽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잠시 잠에 들 수 있으나, 부활의 날에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 날 것이며, 우리의 영혼은 영원토록 그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을 때에, 생명의 씨앗이 우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지체들이라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역사하고 있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이전의 죽어 있었던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 어떻게 비치더라도 그의 생명은 그리스도께 속한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분리 될 수 없는 생명으로 연합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