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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7 (엡1:18)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5. 5. 07:43


성경: 엡1:18절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특별한 간구를 접하게 됩니다. 그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임”을 알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혜의 계시와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할 때에 많은 것을 다루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수반되는 것들까지 “성령에 의해서 마음 눈이 밝혀져”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원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본질상 마음의 눈이 밝혀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7~19) 마음의 눈이 어둡다는 것, 즉 총명이 어두워진 결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게 되고, 또 “무지하고”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지와 총명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그것이 어두워져 그 기능을 바르게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영광스러운 빛이 성경 속에서 그 앞에 비추이고 있고, 자연 속에서도 그러한 계시의 빛이 드러나 있지만 우리의 눈에 베일이 가려져 그러한 계시의 빛을 볼 수가 없으니 이제 그 베일이 벗겨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눈이 원래 창조 시에 가지고 있던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성령님께서 해 주십니다.

 

눈이 멀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정경을 본다 할지라고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정경은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마음의 눈”이 밝혀져 영적인 진리를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사도가 드리는 이 기도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사람들, 다른 성도와 같이 후사가 된 사람들,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드린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영위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성령의 조명하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연약함을 지니고 있고, 이 죄악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원리가 남아 있으므로 해서, 성령의 밝혀 주시는 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성경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매일의 일상적인 삶에서 배도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면 말씀이 그 전과 같이 말하지 아니함을 발견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쌓아 놓은 것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없으며, 그것은 마치 광야에서의 “만나”와 같은 것이라서 영적인 총명은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하니, 우리는 영적인 휴일을 즐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인식하지 않는 한 말씀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우리가 조명을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적은 것밖에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과 성령의 밝혀주시는 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는데서 우리는 결단코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리는 영적인 지식은 점진적으로 자라나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이미 많은 것을 아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다음에 그들의 지식이 더 자라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넓은 진리의 대양의 해변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완숙한 지점”에 이르렀다는 인상을 주는 성도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처럼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단순하게 죄사함의 체험의 차원에서만 생각한 결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성장하게 되고 더욱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정체된 상태에 서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자라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며, 1년 전보다 영적으로 더 진보해 있어야 하고 그 후 10년 뒤에는 그만 큼 더 자라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 갈수록 영적인 지식과 진리를 아는 총명이 더욱 자라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원리는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총명의 눈이 열려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마음눈이 밝혀지는 것을 위해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을 향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끊임없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세 가지 특별한 기도 중의 첫 번째 간구


이러한 점들을 마음에 새기고 이제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알기를 원하는 것, 세 가지 중에 첫 번째 문제인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임”에 대하여 다루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부르심”이고 또 하나는 특별한 부르심인데 그것을 “유효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는데, 그들 모든 사람들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부르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일반적인 소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발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지만, 여기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부르심은 그러한 부르심이 아니라 특별한 부르심 즉 “유효적인 부르심”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일반적인 부르심을 온 세상에 발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의미에서 어떤 특별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어떤 사람도 이러한 특별한 부르심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능력 있게 임하셔서 항거할 수 없는 하나의 명령으로 그들에게 임하시게 될 때에, 그들은 그들의 모든 존재를 다하여 그 부르심에 반응합니다. 사도의 간구는 이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임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며, 그 부르심을 확실하게 믿게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의심케 함으로, 불확실성으로 공격해 오고, 죄를 통하여 우리를 괴롭힘으로 스스로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 한다면 이러한 것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이 확실하다는 것을 안다면 이런 일들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침은 주로 주관적이고 체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말로 진술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직접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또 감사해야 할 것은 그것만이 우리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큰 의심을 하게 되는 날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인침을 받았더라도 죄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환경을 이유로, 또는 질병으로,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마귀가 와서 우리의 확신을 흔들기까지 우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듭니다. 이 때에 우리는 시험에 빠져 스스로 자신의 체험도, 확신도 모두 거짓된 것으로 생각하여 스스로 속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다른 모든 입장을 확실하게 해 주는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이 확신, 이 소망에 있어서 제일 되는 성분 또는 가장 우선적인 요소는 우리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아는 더 깊은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소망과 확신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은 변함이 없이 동일하시며 자신의 목적을 바꾸지 아니하신다는 것보다 더 위안과 위로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든지 시작하시면 반드시 마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계획하셨고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며,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하셨기 때문에 안전한 것입니다.

 

2. 두 번째 간구

이제 사도가 두 번째로 드리는 특별한 간구인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르게 될 영광스러운 상태에 관하여 알게 되기를 위하여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르게 될 영광스러운 상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것으로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안전하게 모아져서 이 위대한 구원의 유익들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참된 개념을 전달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언어의 가치를 우리 죄가 너무나 격하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어진 그 영광에 대한 말씀에 관심을 집중 시키면서, 사도는 “영광의 풍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것 위에 가장 높은 것을 놓고 있습니다. 영광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영광의 풍성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 초월적인 영광에 대하여 무언가 약간의 개념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범주를 훨씬 벗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일들에 대하여 성경에서 듣게 되는데, 그 영광의 중심적인 핵심은 우리가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면 족합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죽음보다 더 훨씬 나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해서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영광에 대한 정보들을 너무나도 많이 듣습니다. 그 모든 것에 상상을 더하여도 그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들어갈 곳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 할 때에 이러한 사실들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소원하게 되기를 간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