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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6 (엡1:15-17 )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5. 4. 07:12


성경: 엡1:15-17절


3절로 시작하여 14절에 이르기까지의 진술을 마친 사도는 다음에 그의 편지를 받는 이 에베소 사람들과 이 편지를 받아 볼 다른 교회들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면서 그가 이제까지 말해 왔던 것을 적용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신학적인 논문을 쓴 것이 아니라 한 목회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강하게 해 주며, 모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용기를 갖고 살도록 그들을 격려하고 적용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사도는 이 시점에서 이제까지 자기와 자기 편지를 받는 독자들이 기독교의 진수를 살펴보아 왔을 것으로 인식하고,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 그 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다가올 큰 수확의 첫 열매를 누리고 있는 사실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특별하게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복락에 참여한 자들임을 스스로 인식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조적인 “이를 인하여”라는 말로 새로운 항목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사실 이제까지 말한 것과 앞으로 올 것 사이를 연결짓는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사도는 기도의 정확한 본질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언제나 그러해야 하듯이 그의 기도에도 두 국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감사하기를 “마지않는다.”고 하는 말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잘 영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대한 나라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한 후사요 기업 무를 자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같은 지위에서 같은 복락을 누리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께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그런 감사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께 간구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아마 그리스도인의 삶의 국면에서 기도의 문제만큼 사람들의 난제로 등장하는 국면은 없을 것이지만 그러한 난제가 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결국 인간 영혼의 가장 고상한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서 정신을 집중시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간구를 하나님께 어떻게 말할 것인지, 어떻게 그들의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지를 잘 몰라 곤란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심각하게 취급하는 순간부터 기도의 심오한 성격을 배우기 시작 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것이 다 간단하게 보고 주기도문을 되풀이 하듯 합니다. 또한 몇 마디의 간구만을 아뢰일 뿐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였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은 전혀 기도를 시작조차 안한 사람이라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조금밖에 기도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기도에 대하여 얼마나 작게만 압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께서 친히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으며 기도하기 위하여 매번 그들 중에서 물러 나가시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제자들이 느꼈던 그러한 것을 느끼기 전에는 우리는 기도 생활을 아직 시작도 안 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생활하는 가운데 기도한 적이 결코 없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정말로 기도하는 어려움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문제를 대면함에 있어서 성경에 풍부한 기도의 위대한 모본들을 살펴보고 지켜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실례들 가운데 사도 바울의 기도가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하나님께 드린 간구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그것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1. 영광의 아버지


우리는 기도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서서 해야 하는지, 엎드려서 해야 하는지, 두 손을 들고 해야 하는지, 또는 시간의 문제도 다루며, 간구해야 할 순서까지 정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기도는 카톨릭의 예배 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징들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그리고 보다 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그러한 상세한 국면에서는 주의를 덜 기울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중심적인 면에서 바르게 되어 있을 때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저절로 바르게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일은 사도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있지 않고, 성령님께 기도하고 있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과 교제하는 것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이시지 목적과 대상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는 중요하고 귀한 분이요 그를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대 제사장이며 우리의 대표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기도는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사도는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관찰할 두 번째 문제는 사도가 아버지께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를 그들에게 깨우쳐 주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를 체험하였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 자신이 기뻐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으며, 반면에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거나 서거나 하지 않았고,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즉각적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멈추어서 무언가를 생각합니다. 그는 먼저 묵상하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행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상기하고, 그는 그가 말씀을 나누려고 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확신 있게 담대함으로 기도해 나감에도 불구하고 경배와 찬미의 요소가 언제나 같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잘 알면서도 실수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동시에 긴박한 일로 바쁘게 기도할 때에, 이런 긴박한 문제를 얼른 처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건성으로 빨리 해치우고 말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긴박하더라도 다른 모든 일과 모든 사람, 모든 것은 그 다음의 문제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스스로 상기하는 사도 바울의 자세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확실한 방식으로 자신을 바울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택하셔서,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보다 더 깊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성육신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생각나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무언가를 더 첨가하고 있는데, 그는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영광의 아버지”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모든 탁월하심과 모든 완전하심과 모든 속성들을 다 함축하는 표현을 담은 “영광”이라는 말로 하나님께 불려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가장 위대한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었다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때에 이 영광이 어느 정도 나타날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가 “영광의 아버지께”나아가 말씀을 드리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는 전혀 기도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만 경외함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이는 그의 영광스러운 성품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지식 


이제 사도 바울이 실제로 드린 간구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이 간구는 에베소서 1장 마지막까지 계속되는데, 두 대목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 대목은 일반적인 간구이고, 다음에서는 어떤 특별한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일반적인 간구부터 생각해야 하는데, 이점은 매우 중요하며 다음에 오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다뤄야 합니다. 이 간구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대하여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렇습니다.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며, 성령을 통해서 “기업의 보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바울이 아직도 그들의 상태에 온전히 만족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위대한 복락을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되 매우 긴박한 생각을 가지고 특별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들에게 더욱 더 많은 것이 열려져 하나님의 은혜의 무한한 부요함을 더욱더 많이 알고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며, 그저 첫걸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탄생이 끝이 아닌 것 같이 회심하는 것은 영적 생명의 한 분야로서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람들 앞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가능성들을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영적 생명의 정상에까지 오른 자로서 그 생명의 정상에서 누리고 있는 영광스럽고, 광활한 전경을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도 포착하여 자신과 같은 위치에서 조망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림에 있어서, 그들의 삶에 필요한 어떠한 것들, 또는 그들의 성화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지 않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기도가 가지는 의미는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우리의 생각들이 너무 사람 중심적인데 있고, 또 너무 주관적이라는데 있다는 점을 알게 하여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사람에서 시작하고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모든 문제로 시작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먼저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하고, 또 실패로 인하여 겪게 될 불행을 면하기 위하여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사람에게 사로잡혀,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지,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반해, 사도의 접근 방식은 그것과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되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또는 행복이나 기쁨 같은 것보다, 그들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것을 간구의 첫 번째 것으로 도입합니다.


이것은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만 예외적으로 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드린 기도에서도 “그들의 사랑이 자라고 그들이 지식과 총명에 있어서 자라나기”를 위하는 기도를 했으며,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기도하였습니다. 물론 그도 행복과 기쁨에 관하여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많지만, 그것을 먼저 말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알 필요성부터 먼저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믿음과 삶의 가장 부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데, 사도 바울이 그것을 얻기를 간구한 것은 에베소에 있는 아직 영적으로 미숙한 성도들을 위해서 드린 기도의 제목입니다. 이 기도는 모든 성도들이 언제나 드려야 하는 것이고 항상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적인 주님의 기도 가운데 나오는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요17:25)라는 기도와 같습니다. 그런데 “아는 것”이라는 말은 매우 강하고 힘이 있는 용어입니다. 그 말은 임시방편적으로 엉성하게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피상적인 지식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그것은 예리하고 정확한 지식, 확실한 지식, 그리고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아직 땅에 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예였으며,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여 글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초대 교회 당시에 그 점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중보기도 하는 것은 그들이 충만한 지식, 즉 정확하고 예리하고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할 뿐만 아니라 “영광의 아버지”라고 묘사된 그분을 아는 지식을 그들이 가질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저 이론적으로만 알고 이지적으로만 아는 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을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실질적으로 교제, 즉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기 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인격적이고 친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를 말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임재를 의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도 무엇인가를 알고 인식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충만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확신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풍요함은 무한하여 우리의 지식으로 한정을 지을 수가 없어서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알 수만 있다면!”이라는 갈망에 주리고 목말라 할 것입니다.

 

 

3. 지혜와 계시

이제 우리에게 제기된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가? 입니다. 욥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11:7)라고 말 할 때에 더 이상 생각할 수도 없게 그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도의 기도 내용을 말하는 구절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는 에베소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거나, 지혜로운 행동과 활동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며 기도해야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삶 속에서 어떠한 조건과 관계들이 지혜와 총명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 즉 지혜와 총명으로 지배당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풍성히 누리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만이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신”이란 말은 성령을 나타낸다는데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합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서는 기도와 간구가 성령을 풍성히 누리기를 원한다는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본질 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분만이 우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길을 아는 지식을 알게 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체험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한 시간 동안도 기도할 수 없다면 어찌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이나 친구들과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한 시간, 아니 몇 시간 동안이라도 대화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께는 한 시간도 말씀을 아뢰일 수 없습니까?


그것이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대답은 오직 한 가지뿐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하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존전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결과로 여겨지는 이점은 매우 단순한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스스로 어떠한 지식을 짜내고 이해를 동원하는 노력을 한다거나 천성적인 어떤 원인으로 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시도는 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어떤 현세적인 차원에서 탐구하여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위대하며, 무한히 우리보다 높으신 분이고, 우리를 무한하게 능가하시는 분입니다. 그러한 “무한성과 광대함”을 포착할 만큼 큰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님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주어진 사역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 지식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주요한 방식으로 이 지식을 준다고 말하여 나갑니다. 먼저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주시는데, 그것을 “지혜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성경의 메시지의 이해에 본질적 기능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그러한 일을 돕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말씀 안에 계신 성령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계시에 복종해야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이해를 돕습니다. 말씀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또한 그 말씀을 읽는 자 안에 계셔서 그 말씀의 의미를 알도록 하십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어떤 사람도 말씀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없을 것인데, 그래서 이러한 성령의 두 가지 작용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눈멀고 벙어리이며 도울 자가 없는 곤고한 죄인들 이었지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완벽한 장치로 주셔서, 그 진리를 우리가 알고, 또 그것을 받아 향유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완벽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