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에베소서강해

에베소서 강해 14 (엡1:11-14 )(1)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4. 30. 09:34


 성경: 엡1:11-14절(1)


서론

이 본문 전체를 한꺼번에 다룰 수는 없지만 각각의 부분적인 진술들을 숙고하기 전에 전체로 다루어 봄으로서 세부적인 부분들을 이해 할 수가 있고, 또한 그 내용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주제에 관하여 분명하게 포착하여 이해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 세상은 세계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어떤 이슈와 같은 뉴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훨씬 능가하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에 대한 관심입니다. 세상의 일들은 매우 불확실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더 크고, 장엄하며, 확실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게 하신다고 하는데, 그러한 “지혜와 총명”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들은 사실 우리에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우리의 삶에서 전혀 멀리 떨어져 있는 무관한 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성령의 조명을 받게 되면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는데, 이제껏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의 계획을 자신의 방식으로 시행하시며, 그 계획 속에 우리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수반되어 결국 조화로운 회복으로 그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 서신에서 기독교회의 본질과 성격에 관하여 가장 넉넉하게 가르치고 있는데, 교회는 많은 방면에서 하나님의 장엄하고 범 우주적인 계획, 그리고 모든 영역과 모든 국면에서 조화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획에 대한 최상의 예증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라는 말처럼, 그리고 이제껏 우리가 강해를 통해서 알아보았듯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신다는 것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계속하여 언급하는 것은, 이제껏 하나님께서 하시는 영광스러운 일들을 설명은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더 심오한 진리를 첨가하여 진술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자꾸 첨가적인 요소가 가미된 진리의 반복이 오히려 즐겁기만 하고, 그 영광스러운 진리에 대한 관심이 넘쳐나고 그 때문에 영광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 한 번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여 첨가하고 또 첨가하여 성도들이 확고하게 설 수 있도록 반복하여 설명함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서, 바울의 이러한 설교를 표현한다면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복음을 폭포수와 같이 퍼 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계획, 곧 온 우주를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거느리시려는 계획을 진행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그 일을 하시는가에 대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초에 있는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는 구절과 13절초에 있는 “너희도 그 안에서”의 두 구절에서 이 위대한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이 시작점이 됩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11절에서 말하는 “우리”와 13절에서 말하는 “너희”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라는 말은 사도 자신을 가리켜 하는 “나”를 의미하는 말로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을 가리키고, “너희”라는 말은 1차적으로는 에베소에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고, 다음으로는 서신을 받아 회람하여 돌려볼 여러 지방에 사는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는 “우리”와 “너희”라는 말을 강조하는데, 그 말은 우리 유대인들과 너희 유대인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며,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진술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너희도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주제를 2장에서, 그리고 3장 5~6절에서 다시 반복하여 말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 총력을 다 기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감탄하며, 감격해 하면서 다시 4장에서 다시 말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고 하며, 그렇게 된 것을 자랑합니다.

 

사실 바울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완고하고 편협한 유대 민족주의자로서 자기의 혈통을 얼마나 자랑하였는지 모르며, 이방인들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 있고 황홀하게 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도의 관점에서 세상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더욱더 흥미 있는 것이 됩니다.

 

세상은 모든 갈등과 부딪침과 분쟁과 긴장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진리에 비추어서 세상적인 것에 등을 돌리며 사도에 의하여 밝혀지는 이 하나님의 계획을 살펴본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실패하는 일들 중의 하나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방면에 복음을 적용시켜서 하나님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 바울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조화를 회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기독교를 완벽하게 그려주고 있는데, 그것을 다섯 가지 요소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를 떠나서는 연합을 소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들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떤 특별한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부모들이나, 할아버지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화해케 하셔서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연인들에게는 막힌 담이 있고, 서로 나누어지는 분쟁만이 있었습니다. 철의 장막과 같이 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담들은 서로 그리고 각자 자기편만을 생각하고 분쟁에 의한 분리와 불행으로 가득한 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상황을 처리하는 오직 유일한 방식은 기독교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을 현대의 여러 난제들에 적용시키거나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 또는 기독교 원리들을 적용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기독교의 교훈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9~10절에서 그 점을 매우 분명하게 말하는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지은바”되어야 하고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 살아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는 그런 일은 전혀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이 앞으로 개선되어 더 좋아진다거나, 지상 유토피아의 건설이나 파라다이스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말세로 치닫게 될 수록 더 악해지고 강포해진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진정한 의미로서 주어지는 화해를 서로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속받고, 그리스도의 피로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피로만 서로 간에 화평을 누릴 수 있는 화해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그들의 죄와 실패를 대신 책임지셔서 그들 대신 죽으심으로 그들을 화해의 자리로 이끌어 들이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해도 화평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는 지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방식으로 죄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같은 기업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 안에서 분깃을 얻었고, “너희”도 그 안에서 분깃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이제 같은 후사일 뿐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임할 복락의 후사들이 되어 함께 기업으로 가지게 될 것이며, 또 모두가 함께 그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나라들은 자기 나라를 확장시키려고 싸우고, 자기 나라의 이권을 위해서 싸웁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돈 때문에 싸우고, 지위 때문에, 인기 때문에 혹은 다른 어떤 것들 때문에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마음과 소유욕과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않고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늘에 있는” 기업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은 생각하지 않음으로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자기와 함께 후사가 된 사람들”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싸움이나 분쟁이나 중간에 막힌 담은 허물어져 버리고 화평합니다.

 

셋째로 하나님 편과 사람 편의 모두를 보여 주는 진술 가운데서 우리가 이 복락에 참여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던 방식을 숙고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진리가 된 방식을 숙고하고 우리가 아는 것이 이제 우리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있어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는 이 지위에 들어가는 방식은 어떤 것인지, 그러한 주제에 대해서 하나님 편에서와, 그리고 사람의 편에서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에 자신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 그리고 자기변호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졌던 바리새인들의 자세를 우리 주님은 미워하셨습니다. 주님의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사상, 그리고 새로운 가르침이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의 선입견들을 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의지하기 쉬운 선입견들을 우리 자신들에게서 제거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로 그러한 선입견에 기울어지기가 아주 쉽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개념화 된 생각과 선입견을 버리고, 자신과 마음을 전적으로 성경에 복종시키되,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하면서, 성경에 접근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가를 살피는 가운데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경에 주입되어 읽혀지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마음의 비밀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마음의 비밀이 우리보다 어찌나 높든지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겸손하게 나와서 그것을 살펴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접근하여 성령을 받아 마음에 조명을 받고 이해력을 주심에 따라 순복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구속에 관련하여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과 성경의 가르침을 주신 하나님께 부단히 감사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조명하심에 따라서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창세전에 그 마음의 원대로 온 우주가 조화를 회복하게 하실 것을 뜻하시고, 그 마음의 원하심을 따라 정하신 뜻대로 그 일을 우리에게 행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성경의 이 부분을 만나게 되었고, 또 이 말씀이 증거되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구상하시고, 그 계획안에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그 안에 함께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그 마음에 우리가 존재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의중과 마음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타락하였을 때, 즉시 그의 목적을 계시하셔서 사람들이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 자신의 뜻을 발표하시고 역사하셔서 그 계획을 창세전부터 이 시간까지 진행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 중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하심의 열매로서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된 하나님의 계획의 열매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목적은 역시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이러한 복락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얻으신 기업을 구속하기까지” 우리를 인 치셨다는 것과, 우리가 이미 그 계획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일러주시는데, 그것을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치심에 관하여 사도행전에서 실제로 그 방편이 어떤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일이 맡겨졌고, 주님은 승천 하실 때, 이 땅에는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 밖에는 남겨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위대한 계획이 그 몇 사람들에 의하여 이행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성령이 자기들에게 임하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한 성령이 임한 다음에 가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갔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는 것은 “진리의 말씀” 또는 “구원의 복음”을 방편으로 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그것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이 구원의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하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 임박한 진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며, 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전도자의 사명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18~21) 그러니 구원의 좋은 소식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하셨다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임박할 진노에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와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를 향한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 기업을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여 놓으셨는데, 우리로 그의 자녀들로 삼으신 모든 것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전적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담당시키시고, 그 안에서 그 죄들을 벌하시고, 처리하셨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이 모든 은사를 주시는 것인데, 바로 그것에 대한 복된 소식이 구원의 메시지이며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무엇임을 인식하는 사람, 즉 “진리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이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를 쓰며, 선한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고, 전하는 사람을 핍박하며 소리 지르면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니 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가적인 진수가 되는 요인인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어서 진리의 말씀을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