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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1 (엡1:6 -2)

새벽지기1 2016. 4. 26. 20:59


우리는 이제 6절에 있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세 마디로 된 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사도는 우리가 복음을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의 차원에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여짐”을 받은 결과로 우리가 누릴 특이한 특권들을 6절에서 상기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그냥 “그리스도”나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그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영광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들”에게 그의 깊은 지혜를 결국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을 우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시려고 한다는 것은 잘 믿어지지는 않지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말인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실 때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마3:17), 그리고 변화산상에서(마17:5), 또한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악한 농부의 비유(마21:37) 속에서도 이 말을 쓰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본체에 있어서 분리 될 수 없으신 한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시는”이라는 말은 영원한 하나님의 본체 중의 본체라는 것을 밝혀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아들로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살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이제 세상은 우리 안에 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어떤 것을 세상이 우리로 말미암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즉 그 아들의 인격 속에서 충만하고 충일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광채와 위엄의 충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밖으로 비취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원 전부터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주시는 사랑은 시작이 없습니다.

그 아들은 그 사랑하심을 받은 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전체를 누리고 계셨던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을 모두 쏟아 부음을 받은 유별나신 분으로서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할 만한 다른 어떠한 말도 없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그것만큼 더 훌륭한 표현은 없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 그렇듯이 우리의 구원은 사랑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안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분량을 측량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에 비춰 볼 때 비로소 알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무섭게 뒤 틀려 꼬인 사람들을 위하여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저질렀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속을 이루기 위해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요, 그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내려다보시는 분이시며,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신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찰하시고 주목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면서 부모들이 체험할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한 부모로서 자녀를 생명이 위태로운 곳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그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자신의 자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고, 그 아들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폭풍을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애타는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그러한 상황에 있는 자기의 아들을 생각 하고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한정하게 확대하여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개념화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치는 것을 보셨으며, 그를 비웃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 세상을 단 한 순간에 끝장 내 버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이 자신의 아들, 자신의 사랑하시는 자가 당하는 모든 것들을 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그 분이 자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을 받고, 그들의 멸시를 받고, 조롱을 당하고, 미워하심을 받고 채찍에 맞으시고, 결국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고뇌와 수치를 다 생각하여 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가 자신을 거역하는 죄인들이 그렇게 함부로 하는데도 불구하고 참으시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멸시와 핍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랑의 가장 절정에 이른 독백은 어떤 인간도 이를 수 없는 주님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 서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버리고, 그를 따르며,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제자들까지도 그를 버려두고 다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그 분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한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하여 오셨던 그분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아버지와 얼굴과 미소까지도 볼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어떠한 것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 온전히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거기서 물러서셨더라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었을 것이며, 기독교인이 될 수도 없었고, 우리는 거듭난 자녀들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자”가 그 괴로움과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와의 관계를 다루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랑하는 자”라는 말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라는 것에 관하여 다루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입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더 높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하심을 받는 것만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7:23에 있는 주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나오는 말에서 확증할 수가 있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됨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친밀성을 의미하며, 그것은 지위와 신분의 문제 뿐 아니라, 우리가 법적으로 아들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 보다 더 큰 것, 즉 아버지께서는 지금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 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믿기지 않는 엄청난 일이지만 사실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입니다.

 


칼빈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은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