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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2 (엡1:7-9)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4. 27. 22:29


우리는 그동안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장엄한 설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서 책망할 것이 없고 흠이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오점이 없어야 할 그 아들 됨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땅에 있어서 넘어지기 쉬우며 죄를 짓기가 십상인데, 우리의 마음에 가질 수 있는 의문이 바로 이러한 것들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그런 높은 지위와 조건을 얻게 되기까지는 많은 것들이 행해져야 할 필요가 있으나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언제나 죄의 장벽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와 죄악들에 관하여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고, 그 조치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특별하고 유별난 일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지혜와 미리 아심을 인하여 또한 목적하심을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내신 것입니다.

 


- 1 단락 -

그 길이 여기 7절에서 요약되어 윤곽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있으며, 또는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식으로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악한 길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깨달아야 하는 제일 되는 것은 어떤 사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금식을 하고, 땀을 흘리며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것으로는 어떤 차이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 전에는 이런 오류가 있었으며, 스스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애쓴 적이 있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발견한 장엄한 사실로 인하여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큰 오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위대하였던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도화선도 바로 그것을 인식한데 원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았다”는 진술의 가장 중추가 되는 요점은 우리가 자신을 구원하게 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종의 조치를 취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 2 단락 -

우리는 이제 다신 한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함을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적용하기 위하여 이 중차대한 진술로 되돌아 와야 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의 죽으심”이라고 말하지 않고 “피”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구속”이라는 말이 사용 되고 있습니다. 구속은 “속전을 주고 구출하여 낸다.”는 의미로서 어떤 사물을 대신하여, 그것에 상응하는 마땅한 값을 지불하는 속전을 의미합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포로로 잡혀서 노예가 되었다면, 그가 구속을 받으려면 지불할 능력이 있는 친족이 그 값을 속전으로 지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도 같은 것이 적용 되는데, 만일 친족이 그 합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그 감옥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전당포에 가게 되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 할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전 세대에 있었던 풍속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 것입니다. 부채를 갚기 위하거나 아니면 급하게 돈을 써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어떤 담보물을 주고서 일정액의 돈을 얻습니다. 그런 다음 그가 자신이 전당포에 맡긴 소유물을 찾고자 하면, 담보물을 건지기 위한 대가를 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속전을 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해방되기에 필요한 값을 지불하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숙고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필요한 정확한 값의 문제인데, 이 문제에 대하여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피”가 우리의 속전의 값입니다.



사도 바울이 “피”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죽으심으로 일어난 일은 구약의 희생제사와 관련되어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피입니다. 불완전한 구약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완전한 의로움을 지닌 하나님의 의를 충족 시킬만한 사람의 피가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그 일을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그 제사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 3 단락 -

우리는 다시 한 번 “구속”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는 구속의 방식에 관한 이 말씀이 지시하는 속전을 지불한 결과로 우리가 죄 사함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대상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못하든지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이 결정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잘못되어 가는 문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기 전에는 우리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순종하는 모든 자녀들”위에 머물러 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필요로 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 대하여 화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 사함은 언제나 구속의 첫 번째 요점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서 죄 사함을 얻게 되고, 예수님의 살아나심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처럼 그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와 죄책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그의 살으심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실 것이며, 그가 행하시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십자가의 처방을 적용함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에 하나님 편에서는 어떤 새 일을 하실 필요가 전혀 없고 단지 갈보리에서 단번에 이루신 것을 단순하게 그에게 적용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죄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그의 모든 불의와 모든 죄에서 깨끗케 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 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길입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4 단락-

이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라고 하는 어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죄 사함과 구속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에 대하여 상고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일이 왜 있었느냐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7절에 나와 있듯이 “그의 은혜의 풍성함”입니다. 그 은혜가 바울로 하여금 전도자가 되게 하고, 대륙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습니다. 그 은혜가 그로 하여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물로 간구하며 전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그를 지탱해 주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되면 필연적으로 바울과 어느 정도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며, 그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노래를 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며, “측량 못할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며, 영광으로 충만하게”되어 기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은 “그리스도의 피”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지불된 값에서 보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풍성함은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요한 사람에게 가서 어떤 선물을 요구하였는데, 그가 그것을 생각하고는 “좋아요. 내가 드리지요.”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매우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용서하여 주십사 하는 청을 드림으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간청함을 받지도 아니한 때에 그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마음으로 배역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됨됨이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주셨습니다. 그러한 것을 주시려고 먼저 마음먹은 분도, 그것을 주신 분도 전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되 인색한 방식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말로 할 수 없는 풍부함으로 후히 주셨으며 넘치도록 충만함으로 아무런 조건도 값도 없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는 “도저히 깊이를 잴 수 없는 바다”보다 더 무한하게 깊은데,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으며 하나님 자신만큼이나 위대하고 광활하다고 밖에 다른 표현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그가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여 알도록 까지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충만한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으니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는 것을 알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불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들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하나님의 성도들 안에 있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예비 된,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한 기업”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이 준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그의 있는 그대로 볼 것이며, 그와 같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누리고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만물을 다스리게 될 것인데,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우리는 종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양자로 받아들여져 아들로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5 단락 -

사실 3~14절에 이르는 말씀은 하나의 큰 문장인데, 여러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문장이며, 모든 말씀들은 하나의 큰 진술로서 같은 주제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각개의 특별한 진술을 그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것을 첨가하면서도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관한 위대한 목적을 선언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최상급에 속한 용어들로 묘사하면서도 설명의 부족을 절실한 마음으로 계속하여 첨가하는 일을 이렇게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넘치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함으로 우리들에게 넘치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함에 있어서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과 함께 그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절대적인 지혜자이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지혜로 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라고 할 수 없고, 더군다나 “총명”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묘사하는 말로 쓰여진 경우가 전혀 없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결여된 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바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함은 죄 사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넘친 나머지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까지도 더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와 총명은 사실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아는 지식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아는데도 절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 즉 “그가 우리를 선택 하셨다.”는 것과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그 뜻의 비밀을 알리셨다.”는 위대한 진술은 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분명히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라고 연결시킬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 위대한 구속의 계획, 구원의 체계를 자신 안에서 예정하신 하나님께로부터 기원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에 따라 구원을 계획하시고 목적하셨으며 그 비밀을 알리셔서 나타내셨다는 말이 되는데, 그 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고 받게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이 두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특별한 메시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우리에게 풍성하게”하셨는데, 그것이 “모든 지혜와 총명 안에서” 넘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의 비밀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을 이해하고 통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이 천국의 비밀은 허락된 사람들만[마13:11, 롬16:25~26, 고전2:6~8, 엡3:2~5, 딤전3:16]이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고전1:7~12, 마11:25~26]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어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 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