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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8 (엡1:19-23 )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5. 7. 06:32


성경: 엡1:19-23절

 

이제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하여 사도가 드린 세 번째 간구 내용을 살펴보기에 이르렀습니다.

 

1.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


여기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더 많은 능력들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알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알게 하려는 중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면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져 버리며, 우리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죄와 실패들로 인하여 “우리가 당도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누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또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평생을 내 영적인 존재를 개발하고 양육하는 데만 쏟는다 하더라도 그 영광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수도 없이 생각하고, 결심했으며, 실행에 옮겼지만, 거듭하여 실패하는 무능력을 스스로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나의 부패되어가는 몸을 생각할 때에도 내가 영광의 상태를 누린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음을 인식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살면서 직업을 가지고, 또한 사업을 하면서 가족과 나를 위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로 인하여, 그리고 삶과 환경의 압력들이 다 합하여 내가 이 영광을 위하여 준비하는데 시간을 내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강력한 원수 마귀는 마치 우는 사자가 먹을 것을 찾아 으르렁거리고 다니면서 나를 공격하려고 매복하고 있습니다. 나는 참으로 교활하여 언제나 형제들을 송사하는 자이며, 죄와 실패와 게으름에 빠져 사망 앞에 무기력하게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몰려오는 이와 같은 생각들로 인하여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누린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즉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 이렇게 있다고 말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 모든 일은 시작 되었고, 마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무궁토록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 안에서 행사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로 인하여 죽음의 권세까지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도 살아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흠도 티도 주름 잡힌 것이나 그러한 것이 없는” 온전한 모습으로 서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서 계속하여 강력한 활동을 하신 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2.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여기서 “따라”라는 말은 “결과”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을 떠나서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성도의 삶 전부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가 될 것이며, 우리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로 성도들 모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계신 “부활”은 이미 우리 안에 일어난 영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늘 인식하고 살아가는 상태, 즉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에 대한 견고한 믿음으로 확신이 있는 상태에서 삶을 영위하는 믿음 있는 성도를 지시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모두 이 진리에 비추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던 다윗처럼, 우리에게 있어서도 구원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에 놀라워하고 감격하여 기쁨으로 찬송하는 삶을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을 시작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진행하실 것이며 결국 그 일을 마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결국에는 그 분 앞에 온전하고 완벽하고 철저한 사람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 면류관을 던지고, “기이함과 사랑에 빠져 찬미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3.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능력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모든 성도들마다 필요로 하는 가장 긴박한 실제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성도가 당하는 고통의 주요 원인은 우리에게 이미 들어온 구원의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도들 모두가 함께 구원의 위대함을 누리고 있으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들 같은 신약성경을 대할 때,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정말 기쁨이 있었고, 감격적인 것이 있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라는 것은 신약 성경의 전체 주제가 되며, 그리스도인은 기뻐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기뻐하기 보다는 침울해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마치 어깨에 큰 짐을 메고 끝없는 염려를 가지는 것과 같은 인상을 풍기며 살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런 저런 사실들에 의해 우리의 기쁨을 빼앗기고, 우리의 구원의 감격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구원의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 삶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완전함과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고, 또 성도로서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인데, 만일 하나님의 능력이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상황은 철저하게 절망적이어서 한 순간도 성도의 삶을 영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인식한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염려할 것이 없으며,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에 대하여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모든 일을 기쁨으로 대할 수 있는 궁극적인 원인이 되며, 그런 생각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반드시 “선”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이제 유다서 마지막에 있는 축도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유다서 1:24~25)

그분만이 우리로 실족하지 않게 지키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그렇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흔들리지도 아니하며,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든지 결코 실망할 수 없으며, 소망이 있는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될 것에 대하여 인식함으로 인하여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놀라운 특권을 인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오고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이 새 생명의 기이함과 이적을 더욱 인식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나의 위로요” “나의 위안이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보증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영광 중에 그 앞에 서게 되기까지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4. 교회는 그의 몸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더 부가적인 것을 대하게 될 것인데, 사도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신 것을 우리가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우리가 알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마지막 두 구절인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라는 말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하는 것을 봅니다. 또 이 서신의 2장에서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요긴한 모퉁이 돌”이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기초이며,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집”의 지체들입니다. 그는 또한 교회를 위대한 제국에 비유하여 설명하며, 교회를 신부로 묘사하고 있고, 우리 주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비교하여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묘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시키려고 의도된 것인데, 특별히 우리가 연구하려고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 본문의 두 구절에서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구절의 문맥으로 보아 그분 안에 있는 강력한 능력이 어떻게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지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며 얻으신 기업”을 우리가 누리게 될 것임을 확신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있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생각해 볼 때, 본문의 밝히고자 하는 “이런 능력에 대한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은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인식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려 놓고서 그 관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원리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유기적이고 생명적인 방식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몸은 여러 부분의 집합으로서, 손과 발 팔 다리 등등이 합하여,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몸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묶여 있어서 언제든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살아있는 생명적인 연결을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연합이며 신비적인 연합으로 불가분의 연합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을 함께 나누는 유기적인 것이기 때문인데, 그것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며,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영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로 오직 그분만이 유일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다른 권세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생명의 원천과 중심이 되시니, 그 몸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의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없으며 한 순간도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번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게 되면, 임의로 그 몸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가 없고, 그분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미끄러져 실족하여 잠시 동안 세상에서 방황한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그렇게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고, 그것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 연합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며 영적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떠난 성도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말이며, 단지 병이 들어 있어서 그 몸이 아니라고 잘못 인식하거나,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뿐, 성도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존재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므로, 그들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몸입니다.


세 번째 살펴 볼 것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으로 몸을 충만케 한다는 말씀으로서,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한다.”(골2:9)는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이 거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내 몸의 각 부분은 내 생명과 나로 충만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생명과 내 존재는 내 몸 각 부분에 있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멈추는 그 순간 내 몸의 각 지체는 죽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에 이르는 신경계를 절단하고 핏줄을 끊어 버리면, 그 손가락은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을 곧 멈추어 버리는 것처럼 내 생명 전부가 각 지체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하여 주어진 놀라운 진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인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죄와 육체와 마귀의 세력에 의한 유혹을 당하고 있을 지라도, 그러한 것들에 영향을 받아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들과 은혜들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 안에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힘의 원천이며, 우리들 각 지체들을 활동시키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 되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로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생명의 힘을 의지하여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약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한 에너지를 받아 살아가는 강한 지체들임에 틀림없으니, 실패와 좌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욱더 그 기능을 연마해 나감으로서 그 무한하고 유용한 에너지가 있음을 발견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에서 능력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가서, 급기야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완전한 사람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5. 최종적인 완성

이제 우리는 에베소서 1장에 대한 결론 지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승리의 삶을 사는 비결로서 이런 일들을 인식하는 것을 능가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풍요로운 체험을 누리는 길은 신약성경의 이와 같은 진리를 포착하고 붙잡아 적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체험에 이르는 고속도로는 진리라는 것을 항상 인식해야만 합니다. 오직 체험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오히려 “비참과 그늘에 매인” 삶으로 전락시킬 우려가 너무나도 큽니다.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말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힘이 몸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인식하고, 언제나 그곳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는 이 능력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드러난 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그 능력은 얼마나 놀라웠던 가를 발견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지옥과 악의 모든 세력들, 사망과 무덤이 그를 붙잡아 놓으려 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도 그를 붙잡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에서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심으로 이 순간에도 바로 거기에 계시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어떤 역할을 감당하시든지, 하나님의 권위의 상징인 우편에 있다는 것은 그곳에서 영예를 받고 있다는 표지로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세와 능력들 위에 뛰어난 권위와 영예의 자리에 놓여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이 이 모양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세들의 세력 때문인데, 하나님의 아들은 그 모든 권세들보다 더 훨씬, 무한하게 뛰어나십니다.


그는 그들이 입은 엄위와 존영과 권세와 지위보다 더 무한하게 큰 것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선한 천사들, 복 받은 천사들보다도, 모든 권세들 위에 높이 계십니다.(히 1:5,14) 그리고 만물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데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만물을 통제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영적인 세계나 물질세계를 다 포함한 모든 만물을 장악하는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성을 지니고 이런 뛰어나신 영광 중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예수님 안에서 인성을 높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이 모든 권세와 모든 권위를 입고 거기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분량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권세와 이 모든 영예와 모든 존영을 그에게 주신 것은 교회를 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가 이처럼 하신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이 모든 능력을 행사하게 하기 위함인데, 자기 백성들을 끝내 구속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흠 없이 알현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만 하신 일도 아니고, 아버지와 영광을 함께 다시 누리기 위한 것만도 아니며, 우주 위에 이 큰 권세를 사용하시고 누리기 위하여서만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모든 것들이 포함 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내가 있고, 우리가 그의 신비적인 몸의 지체가 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권이며, 영예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또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 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며 다투고, 노력하며, 그것을 위하여 많은 희생들을 합니까? 그런데 성도들은 세상에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영광의 높은 지위를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과 이 존귀가 여전히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라는 말씀의 뜻을 알게 될 것이며,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담대하여 기쁨으로 찬송하는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