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에베소서강해

에베소서 강해 19 (엡2:1-3 )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5. 8. 06:58


성경: 엡2:1-3절


1. 서   론

이제 우리가 에베소서 강해의 2장에 이르게 되었는데 우리가 이미 배웠던 1장의 논증에 관해 이해하지 못하면 2장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1장의 논증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주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계획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어떻게 활동하셔서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진술들을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게 달린 일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임을 입증해 나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얻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와 후사와 놀라운 기업을 받게 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인쳐 주셨음을 확신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늘에 속하여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이미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이미 이루신 일이라는 그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인치심에 의해서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어서, 이지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큰 영광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렵고, 벅찬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서 확연하게 보이는 것처럼 믿어진다면, 어떠한 환경이 주어질 지라도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죄 안에 있는 사람

당시 바울의 서신을 받아 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믿고 있었으나 그들의 신앙은 아직 어린아이들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그들이 이해의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크기와 위대성과 장엄함에 대해서 붙잡아 장성한 성도로 성장하여 주변의 이교주의자들에게 현혹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에 관하여 명확히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기 전의 과거에 우리가 어떠한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전에는 이 구원의 위대성에 대하여 올바른 개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출발하는 지점은 우리가 처한 정확한 위치, 곧 부패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수고하고 무거운짐 진 자”들의 친구 정도로만 인식하여 우리의 어려움을 도와주시는 분이기에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구속의 전체를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속을 알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의 죄의 깊이를 인식해야 하며, 왜! 성자 하나님 되시는 분이 인성을 스스로 취하시고 어린아이로 태어나야만 했으며,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타락하여 죄 가운데 있다고 하는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들은 진화론적인 생각으로 가득하여, 사람은 언제나 발전하고 개선되어 종국에는 선을 이루고, 지상 낙원을 이루고 살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사람은 부패하여 점점 더 악해 지고 흉포해 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조 이래로 언제나 그래왔듯이 사람들은 더욱 교활해지고, 더욱 흉포해지며, 문명이 발달할수록 세상이 더욱 부패되어간 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앞으로 점점 진화하여 완전한 상태를 이룰 것이라고 합니다. 이 뻔뻔스러운 사람들의 말은 모두 허위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철학이 발전하고, 심리학이 발전하고, 새로운 교육과 문화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도덕성이 교육과 환경에 의해서 완전한 모습으로 진전되는 현상은 결코 없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른다면 문명의 발달로 미개인들이 사라짐에 따라 범죄도 줄고 죄의 인식도 선한 상태로 바뀌어야 할 터인데, 전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악하고 교활해진 범죄의 형태만을 대하게 됩니다. 세상은 절대로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악으로 치닫는 다는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은 사실을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으며, 여러 사실들을 뛰어 넘어서는 추상적인 방법이나,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이성으로 해결하려고 하며, 그저 증상들을 진단하고 어떤 의미에서 수면제와 진통제와 해열제들을 주면서 잠시 동안 편안하게 해 주면서 우리가 건강하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함으로서 근본적인 문제를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회개하라는 말씀으로 사실적으로 죄 앞에 대면하게 하며, 근본적인 원인으로부터 접근하여 잘못된 문제를 파헤치고 도려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참아내기가 힘들고, 아프지만 진정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 구절에서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죄에 빠진 인간에 관한 성경적인 관점을 4가지로 요약합니다.


첫 번째로 “허물과 죄들 안에서 죽었던”것이 인간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의 겉모습으로는 살아있지만 실상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것을 인식할 때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의 위대성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정신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해야 하는데, 세상이 “공중 권세 잡은 자”에 의해서 지배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작용하고 있는 악의 원리에 의해 지배받게 됩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란 마귀, 사단으로 이 세상에서 신으로서 나타나며 행세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영위하는 모든 유의 삶을 결정짓고 인간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악한 영적 권세와 힘을 조정하는 자입니다.


아무리 선하게 보이고 아무리 좋게 보일 지라도 그들에 의해서 조장되어지는 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로 결국 망하게 하는 조건과 상황에 사람이 빠져들도록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성경처럼 더 실제적인 면을 다루는 것은 없으며, 성경이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개념처럼 우스운 것은 없습니다. 사실 세상이 이처럼 뒤범벅이 된 상태에 빠져 있는 것도, 성경이 사람에 관해서 말하는 진리를 사람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상태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이며 그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지 못하여,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두 번째로 인간이 이런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며, 그런 일에 관심도 두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원한 삶에 대한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의 영화로움에 대하여 접하게 될 때에 오히려 그것을 지겹게 여기고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어떠한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어째서 사람이 이런 상태에 빠지고, 또 그러한 조건에 빠뜨립니까? 그것에 대하여 바울은 2절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고통이 되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이 이 모든 고통과 재난을 불러온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죄는 어떤 자질이 모자란 것이나, 단순히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의도적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불순종으로 나타나며, 순종과 떨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를 지시하시는 하나님의 권리와 다투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졌으며 창조 되었다고 하는 생각을 싫어하고,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상에 대하여 모욕감을 가지며 분개합니다. 자신이 최고이며,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자기 위에 있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고,  모든 것 위에 있어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좋아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반대하며 하나님께 대적하고 있는 사람의 본성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 즉 반역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고통은 그 불순종에서 모두 기인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교제하며,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인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모든 방면에서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있고, 누구에게도 심지어 하나님께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불순종하고, 스스로를 주장하며, 역설하며, 자기의 충족을 자랑하며, 그 안에서 과대망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사람이 타락하여 지은 죄의 결과로 죄의 노예가 되어 그 악의 권력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세상의 정신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중에 잉태되어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 타락한 죄의 본질은 마음에 있기 때문에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할 수가 없는 본질상 부패한 악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치명적으로 실수하는 것은 죄의 본질과 성향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고 행위와 행동들의 차원에서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죄”는 모든 도덕적인 행동들이 포함 되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죄는 “네 마음과 목숨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할지니라.”는 말씀에 일치되는 삶에 정 반대 되는 행위, 즉 “죄”의 본질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 죄 가운데 있는 우리의 상태와 조건을 묘사하고, 곧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기 전에 우리가 어떠하였는가를 묘사하였고 두 번째로는 어떻게 해서 그런 상태에 빠져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 요점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는 실제적인 방식으로 육체에 대한 투쟁을 다룹니다. 사도는 죄 가운데 빠져서 은혜 밖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허물과 죄”의 생활이라고 하는데, “허물”이라는 말은 진실한 것과 정직한 것에서 실족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정직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어졌으나, 그것에서 실족하고, 벗어나 더 이상 정직하지 못하여 마치 땅바닥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과 같이 올바른 위치에서 벗어나 수직에서 기울어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들”이란 말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죄의 속성들이 밖으로 표출되는 외적인 표징들을 가리킵니다. 육체 내부에 숨어 있던 죄의 속성이 악한 행동으로 나타나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의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너무도 헌신적이고 너무도 훌륭한 삶을 살다가 간 자연인들을 생각 할 때에 그들이 결코 육체의 욕심에 따라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의 타락 이래로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인류 전체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체의 원하는 것”들에 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잠을 자고 싶어 하고, 쾌락을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하고, 안일에 빠지기를 원하고, 성적인 것을 원하고, 매혹적인 것을 바라는 욕망들을 생각할 때에 그 모든 것들은 우리 몸의 본질적인 진수가 되는 요소로, 본성적이며, 본능적으로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로서 선하게 창조된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들은 본질적으로는 선하며,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잘못입니다. 배고파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그 욕구를 체우는 것 또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먹기 위해서 산다면 그것은 육체의 욕심입니다. 만일 먹고 싶은 욕망이 우리를 통제하고, 육체의 원하는 것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으면 그것은 육체의 욕심에 대한 하나의 표증입니다. 마찬가지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마시는 모든 것들이, 만일 마시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도 육체의 원하는 것이 되듯, 잠을 자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잠꾸러기가 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어서 쾌락은 모두 옳으며, 즐거움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 쾌락에 지배되고 즐거움에 지배되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다툼이 있다면 그것은 육체의 원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안에는 육체의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주실 때에 그것은 복종되도록 되어 있었고, 제자리를 지키도록 되어 있어서 우리는 절제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육체의 원하는 것들”이 통제권을 가지게 되어, 권위의 자리에 올라서서 우리를 충동하고 강권하는 일들을 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의 힘은 너무나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 육체의 원하는 것들은 마음에도 해당이 됩니다.


우리의 관심과 행동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지시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지 마음에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무엇을 위해 살든지 그것은 마음의 원하는 것이요, 마음의 욕심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가장 낮은 수준에서의 마음의 욕심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질투, 시기, 악의, 교만, 혐오, 분노, 성냄으로 그것들은 마음의 원하는 것들의 나타냄에 불과합니다. 좀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서 그 문제를 살펴본다면, 야망에 따른 욕심입니다. 부요, 명예, 권력, 권세 등 성공하고 싶은 욕심들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더 수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지적인 욕구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지만 그러한 것들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삶이 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원하는 것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육체의 욕심이라는 통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욕심의 상태 가운데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으며 하나님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출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뿐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를 앙망하는 것이며, 그의 충만한 데서 받는 것이며,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만 우리는 안전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 관한 네 번째 요점을 살펴보기에 이르렀는데, “불순종의 아들들”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진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미 숙고해 본 그러한 조건에 있는 사람에 관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시며, 또 어떻게 생각하시며 무엇을 행하시는가를 보여 줍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고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는 방식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도 다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표현을 좋아하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기를 꺼려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모든 것을 포함시켜 감추어 버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임에 틀림이 없지만 역시 동등하게 공의와 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의 맨 처음부터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찾아 오셔서 그에게 심판을 선고하시는데, 그는 아담을 동산에서 쫓아내고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셨습니다. 화염검은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공의의 칼, 하나님의 진노의 칼, 죄인을 벌하시는 심판의 칼입니다. 처음부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과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또한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이스라엘 자녀들의 여러 징벌, 민족이든 개인이든 간에 징벌하시는 것들이 하나님의 공의에서 나타납니다. 이제 신약의 최초의 설교자인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하였으며, 자신에게 나온 바리새인들에게 “누가 너희더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사랑의 하나님에 관해서 가장 놀라운 진술로 흔히 요약이 되고 있는 구절 속에서 그 하나님의 진노를 발견한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3:16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36에 보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러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진노로부터 구원하시는 길을 제공하시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인식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비록 우리가 허물과 죄로 인해서 죽었고, 죄로 인해서 오염되었으며, 서로를 미워하고, 실제로 죄를 지으며 허물과 죄 가운데서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그래서 절대적으로 무력하며 무능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거스려 범죄한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손상시켜 드린 바로 그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인격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의 어떠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을 제공하셨습니다. 그것이 “그처럼 놀랍고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야 말로 영원한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며 우리 스스로는 결단코 하나님과의 화해하는 길을 틀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