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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24 (엡2:14-17) / 로이드존스

새벽지기1 2016. 5. 19. 07:42


성경: 엡2:14-17절

 

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사도 바울은 이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는 말로 논증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이 말은 구약이나 신약에서, 구원의 문제 전체에 관련해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히브리서 13:20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오, 그의 독생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 그 안에서 화평과 평강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왕”일 뿐 아니라, “평강의 왕”이시기도 하며, “그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우리가 1~10절까지의 말씀에서 “죄가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았으며, 11~13절 사이에서는 “죄가 언제나 분열을 가져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열 시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14절에서 우리는 죄가 사람을 분리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더해 나가서 사람을 원수 관계에 놓는 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는 고통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적대감정을 가지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대감정을 갖게 합니다.

죄는 본질적으로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기독교 복음의 시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조차 자신을 자율적인 존재로 세우고자합니다.

사단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누군가?” “사람이 얼마나 크며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인식하지 못하여 하나님은 너를 노예처럼 계속 붙잡아 매어두고 종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 너 자신을 세우지 않으며, 어째서 너 자신의 주장을 하지 않는가?” “엎드리지 말고 일어나라!”

 

그래서 인간은 일어났고, 일어났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결코 일어서서 버티지 않아야 할 방식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설 수 없었던 방식으로 서려고 노력함으로서 타락으로 인도되어 그 결과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교만과 자기중심에 기인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하나의 신으로 세웁니다.

그는 자기가 자율적인 존재요, 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들의 권리와 요구들에 의해서 말하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관심, 자기 찬양, 자기 자랑, 자기주장에 대한 하나의 표증입니다.

그는 부단히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 주위에 쓸어 넣습니다.

 

자기 혼자 존재한다면 아무런 고통도 없었을 것이지만, 모든 다른 “나”가 나와 똑같은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분쟁이 있고 투쟁과 질시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한 목표를 놓고 동맹하기도 하지만 내분으로 가득 차 서로 대적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똑 같은 형태로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를 떠나서는 어떠한 화평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악한 영의 지배에 따라 조종되어질 수밖에 없고 사람은 사회적이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은 죄의 영향을 받고 있고 또한 병든 상태에 있기 때문에 어떤 교육이나 환경을 통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화평이라고 하십니다.

그는 화평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화평이십니다. 또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화의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누릴 수 있기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된다는 또 다른 방식의 논리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고 그리스도의 방식에 따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화평의 복락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하며,

그의 몸의 부분으로서 생명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부터 나가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사이에 있는 중간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막힌 첫 번째 분리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두 하나로 받아들여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고 한 지체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하나의 명령체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켜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그렇게 만드시고 사람들이 적대감정에서 해방되도록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림으로 그것에서부터 구출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2. 화평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방식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처럼 그는 자신이 화평이시며, 또 화평을 만드십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심으로서 화평의 조건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화평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화평은 실제적인 적대감정을 막는 일만 의미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화평을 이루시는 방식으로 교회를 생성하고 만드시고 또한 존재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화평을 이루시는 방식을 이해하려면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이러한 일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창조되어 존재케 되었습니다.

교회의 유일한 기초는 머리되시는 예수님이시고 교회는 물과 말씀으로 창조되기 전에는 있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우리는 막혔던 담이 헐어진 상태에서 교회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하고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인해서 “새로운 사람들”이라고 불리게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창조”입니다.

 

옛 것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우리의 몸에는 모두가 똑 같은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어, 모두가 한 형제로 화평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로 동일한 사람들이 된 성도들은 “너와 나”라는 각자의 개념에서 떠나 그리스도와 같은 한 몸의 각 지체로 살게 되어 모두가 하나로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3. 유일한 중보자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모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며, 이런 일로 고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가 깨어지고 우리는 이 모든 고통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화해하고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함께 화해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이웃들과 다른 관계를 맺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일 되고 첫째 되는 계명으로 말씀하신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기 전에는 두 번째 계명으로 주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코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목케 하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적대감정에서 우정의 관계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원수의 상태에서 다시 합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적대감정이 철저히 없어진 완전한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4. 원수의 상태에서 서로 합하기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로 자발적으로 완전히 일치되고 친밀한 위치로 인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5. 어떠한 것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화목이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화목의 관계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을 “화목케 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성도들은 죄의 문제도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적용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둠이 전혀 없는 분이신데, 나는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를 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는 순간 나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손상시키고 있으며 그 죄의 행동은 나와 동반자이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빛 되신 하나님에게 혐오스럽고 역겨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무서운 점이 죄가 교제를 손상시키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화목”이란 말은 우리가 교제 밖에 있으며 그 교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마주치게 해 줍니다.

 

그러나 화목은 우리의 어떤 조건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며 산출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떠나서는 어떠한 화목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다는 말씀이 그 요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화목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 위대한 축복의 길을 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영예와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함께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드시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게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는데, 그것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나 이적을 통해서 행해지지 않고 그가 죽으심으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이미 되어진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지를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다른 말로 해서 그 길과 가능성을 만드신 다음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그렇게 행하셨음을 말하였고, 그것을 선포하여 주셨고 우리에게 새로운 소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처럼 애절하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가능케 되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주님이 지상사역에서 주님 자신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진 메시지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선포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한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일은 가능하고 또한 이런 일은 일어났으며,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그것을 전파하셨고, 그들에게 그것을 제공하셨으며, 그들 앞에 그것을 세웠으며, 그들을 그곳으로 초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먼데 있는 이방인이나 가까이에 있는 유대인 모두에게 똑같이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최고되고 제일차적인 요구는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죄에 빠진 사람은 안식이 없고 곤고하고 불행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사야 57:19절의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 지어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렇게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은 끊임없이 요동하는 바다의 모습과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은 바다와 같이 휴식이 없습니다.

 

에덴에는 어떠한 요동도 없었으며 안식이 없는 것이란 도무지 전혀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인간에게 작용하는 한 가지 세력만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와 교제하며 서로 교통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누리고 있었고 그의 생명은 평안과 불안이 서로 뒤섞이지 않은 상태에서 불행이나 걱정, 고통과 같은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은 무죄한 상태에서 완전히 평안하고 고요하고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지만 다른 세력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복종하게 됨으로서 타락하여 마귀의 세력, 악의 세력, 지옥의 세력이 거기에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휴식이 없는 갈등의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사람은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존재하며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마귀가 이런 공격을 할 때가 있고 우리는 공격을 받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폭풍이 바다를 때리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마귀와 그의 세력이 마치 고삐가 풀린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우리의 작은 생명들은 거대한 폭풍 속에 있는 바다의 물결처럼 이리저리 떠밀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환경을 통해서 전쟁이 오고, 질병이 오고,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걸려 죽거나 어떤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전복당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형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것이 타락의 결과로서 주어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인간이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밑 빠진 독과 같이 체우고 채워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평화가 없습니다.

어떠한 학식이 있고 지성적이고 높은 도덕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또 그리스도만이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평화를 제공하시고 또한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분으로 채워질 때에라야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누릴 수 있으며 참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