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독교강요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8) / '하나님 은총으로 자유를 주셨으니'

새벽지기1 2016. 5. 6. 07:02


하나님 은총으로 자유를 주셨으니

죽음에 이르는 원죄에서 오직 은혜로 자유의지 얻어


'제8강좌' 원죄: 죄책과 오염의 전가
               일반은총: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기독교강요 2.1.1~2.5.19)


  
 ▲ 문병호 교수 

1. 원죄(peccatum originale, original sin): 죄책과 오염의 죄과

우리 자신에 대한 참 지식은 창조의 때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의 고귀함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고귀함을 상실한 비참함의 간격(間隔)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는 데서부터 비롯된다(2.1.3). 모든 사람은 ‘맹목적인 자기애’(caesus sui amor)가 있어서 스스로 옳으며 스스로 유능하다고 여긴다(2.1.2). 이러한 망상적인 자기도취(自己陶醉)에 빠져서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죄를 범하였다. 그리고 그 유혹 가운데 그들의 후손들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바에 따라서 매사에 실족하게 되었다(롬 14:22).


하나님께서는 처음 인류에게 자유의지(arbitrium liberum)를 주셔서 그들이 ‘뜻을 다하여’(기꺼이, libenter, willingly) 자신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신께 영광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들에게 부과된 ‘복종의 시험’(obedientiae examen)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들의 ‘교만’(superbia)으로부터 배태(胚胎)된 ‘불순종’(inobedientia)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롬 5:19). 사람이 사람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게 되니 그 분의 말씀에 충실하지도 그 분께서 베푸신 모든 은총을 감사하지도 않게 되었다. 죄는 본질상 이러한 ‘불충’(infidelitas)과 ‘배은망덕’(ingratitudo)에 똬리를 틀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떠난 일체의 ‘야심’(ambitio)이 모두 죽음에 이르는 길이거늘(2.1.4)!


죄는 모방에 의해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으로 유전된다. 우리는 모두 죄 중에 잉태되었으며 그 가운데 출생하였다(시 51:5). 최초의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음이 ‘영적 생명’(vita spiritualis)이었으므로 그 분으로부터 ‘멀어짐’(alienatio)이 ‘영혼의 죽음’(interitus animae)이 되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에 사망의 ‘저주’(maledictio)가 편만하게 되었다(2.1.5). 원죄는 죄과(culpa)로 인한 오염(corruptio)과 죄책(罪責, reatus)을 포함한다. 죄과로 인한 죄책은 사망의 형벌을 뜻한다. 그리고 죄과로 인한 오염은 전적인 무능과 전적인 부패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순수하게 지으셨다. 죄는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타락으로부터 왔다. 죄는 사람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의지 가운데 지은 죄행(罪行)으로부터 말미암는다(2.1.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작품이(operi suo) 아니라 자신의 작품의 부패를(operis sui corruptioni) 미워하신다”(2.1.11).

타락 후 모든 사람에게 임한 죄의 ‘전염’(contagio)은 영혼과 육체의 ‘실체’(substantia)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죄가 언약적으로 전가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각각 선하게 창조하신다. 원죄는 이러한 영혼에 전가된 유전적이며 선천적인 죄이다. 원죄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사망의 죄책이 ‘타락한 본성으로부터’(ex natura) 부과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은혜로’(ex supernaturali gratia) 말미암지 않고는 그 형벌로부터 무죄방면이 되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2.1.7). 첫 언약의 머리인 아담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이후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 되었다(엡 2:3). 육으로 난 것은 단지 육이므로(요 3:6) 사람의 영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 앞에는 생명의 문이 닫혀 버린다(요 3:5; 롬 8:10).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게 된다(고전 15:22). 이렇듯 원죄는 최초의 죄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형벌을 모두 포함한다(2.1.6).


모든 사람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사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다. 사형수로서 언도를 받았음에도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삶 동안 여전히 사망의 죄를 짓고 있다.

“이 부패는 우리 안에서 없어지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육체의 일(opera carnis)을 하는 열매를 맺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원죄를 단지 ‘원의의 결핍’(carentia iustitiae originalis)이 아니라 행악하는 ‘욕정’(concupiscentia)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이라도, 오성으로부터 의지에 이르기까지 또한 영혼으로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 전부(ab intellectu ad voluntatem, ab anima ad carnem usque), 이 정욕으로 더럽혀져서 가득 차 있다’(2.1.8).

“사람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야 한다”(2.1.9).


2. 자유의지(arbitrium liberum):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의지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측면에서만 최고의 고귀함이 있다. 사람은 그 자신의 선행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써 지고한 복을 받았다. 타락 후 인류는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멀리했으므로 이제 그들이 스스로 서보고자 하는 것은 갈대로 자신을 높이 들고자 하는 것보다 더욱 어리석다(2.1.1).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전적으로 무능해지고 부패해져서 오직 죄를 짓고자 하는 뜻 밖에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상실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행위를 선한 것으로 받으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지게 된다.


자연의지는 단지 노예의지에 불과하다. 그것은 죄의 종으로서 사망에 매인 사람들이 자연이성의 분별력에 의지하여 일을 행하고자 하는 뜻이나 의향에 불과하다. 반면에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의지이다. 자유의지는 노예나 사생자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만이 가지는 그 분의 친자녀의 의지이다(롬 6:15~23; 8:9~17).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의의 종(servus iustitiae)으로서 의에 매인 오직 은혜로 거듭난 중생자의 의지라고 할 것이다(2.2.4~6, 12).

“자유의지는 은혜를 통하여서 세워진다”(liberum arbitrium constitui per gratiam).

주의 영을 받은 사람은 진정한 자유자로서(고후 3:17)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라는 주님의 음성을 붙든다(2.2.8). 반면에 비중생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조(自嘲)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만(自慢)에 빠질 뿐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첨삭(添削)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으니, 우리의 의는 이러한 노예의 의지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는 자녀의 의지를 지님에 있다(마 5:17~20). 진정한 자유의지는 주님의 영을 받아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 분께서 친히 행하심을 믿고 행하고자 하는 의지이다(요 14:13~14).


자유의지는 할 수 없다함도 아니요 스스로 할 수 있다 함도 아니며 주님의 은혜로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함이다. 그러므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humilitas)을 꼽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의지를 누린다(2.2.11).

자유의지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그 분의 의를 분별하여 선택하고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의향을 의미한다. 자유의지는 원함과 행함을 모두 함의한다(롬 7:18~19). 오직 이러한 의지는 성령의 ‘격동으로’(spiritus impulsu) 말미암는다. ‘영은 자연으로부터가 아니라 중생으로부터 기인한다’(spiritus non a natura est, sed a regeneratione(2.2.26~27).

타락 후 모든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non posse non peccare). 그러나 필연적으로 죄를 지으나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짓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원적 노예의 멍에’(iugum voluntariae servitutis)를 메고 자유롭게 죄를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연성’(necessitas)과 ‘강제(coatio)는 구별해야 한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지으나 자진해서 짓는다(2.4.1). 그러므로 죄에는 사망의 형벌이 따른다(2.3.5).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나 거듭난 사람은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libenter) 선을 행하게 되니, ‘사람의 의지는 자유에 의해서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2.3.14).


펠라기우스는 죄가 필연적이라면 죄가 아니며 자원적인 것이라면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노예의지를 가지고 죄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이나 자원해서 죄를 짓는다(2.5.1).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선행을 행하게 하시거니와 ‘우리의 공로들’(merita nostra)이 아니라 우리에게 베푸신 ‘자신의 은사들’(dona sui)에 대해서 상급을 주신다. 그러므로 은혜 가운데 상급을 얻기 위해서 경주를 경주함이 마땅하다(2.5.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그것으로 곧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은 아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게 되나 그 의지대로 행하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스스로 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셔서 우리가 그 분께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신다.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의 능력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할 만한 일만을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자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율법으로 명령하신다. 그러나 여기에 달콤함(suavitas)이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조차 명령하셔서 스스로 은혜의 약속을 이루신다(2.5.4~11). 그러므로 오직 은혜로 의지를 갖게 되며 오직 은혜로 이룸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하신 일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되도다(2.5.15)!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있으니 그 표는 우리가 스스로 행함이 아니요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분이 우리를 움직여 이루시는 분이심을 확신함에 있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진정한 겸손 가운데 다음 말씀을 믿음으로 수납한다(2.5.12).

“내가 오늘날 내게 명한 이 명령은 내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