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독교강요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6) / '하나님의 형상 가진 예배하는 존재'

새벽지기1 2016. 5. 3. 13:42


하나님의 형상 가진 예배하는 존재

사람에게 자유의지 주셔서 순종 통해 영광받기 원하신다


'제6강좌'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격적 찬미의 도구(기독교강요 1.15.1-8)


  
 ▲ 문병호 교수 

1. 원(原)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originalis)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영혼(anima)과 육체(caro)로 지으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iustitia)와 지혜(sapientia)와 인자하심(bonitas)을 드러내는 가장 고상하고 놀라운 표본’이다. 사람의 육체는 ‘흙’이거나 ‘티끌이나 재’에 불과하다(창 2:7; 18: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심으로써 생령이 되게 하셔서(창 1:27) 불멸하는 영혼이 거주하는 ‘집’이 되게 하셨다(욥 4:19).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의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상(非常)한 섭리를 높이 찬양함이 마땅하다(1.15.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성의 완전한 탁월함(integra naturae humanae praestantia)’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모든 부분에서 빛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고유한 좌소(座所, propria sedes)’는 영혼에 있다. 영혼에는 지식(혹은 진리)과 의와 거룩함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의 정수가 새겨져 있다(골 3:10; 엡 4:24). 하나님의 형상이 이러함은 영원하신 말씀 안에 계셨던 ‘생명’이 곧 ‘사람들의 빛’(요 1:4)이었다는 사실로부터 확증된다(1.15.4).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혼에 새겨진 ‘신적인 그 무엇(divinum aliquid)’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은 그 분의 본질(ouvsia, essentia)이 유출(流出)되거나 분여(分與)되어서 주입(注入)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신성을 담지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칼빈의 동시대인이었던 오시안더(Andrea Osiander)가 영혼과 육체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고 있다고 믿고 그것을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유비되는 것으로 여긴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1.14.2).


사람은 ‘본체의 유입(substantiae influxus)’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되, 우리를 하나님과 ‘동일본질(consubstantiales, o`moousioi)’로 만들지는 않는다. 구원의 마지막인 영화(榮化, glorificatio) 상태에 이른 하나님의 백성도 여전히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할 뿐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성 자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신화(神化, deificatio)의 과정에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에 따라 사람에게 맞추셔서 새겨주신 고유한 영적인 형상이다. 그것은 사람의 사람됨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영화는 사람이 사람인채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의 본질의 전이(轉移, tradux substantiae Dei)’라고 보는 범신론적 사고는 기독교 진리와 부합될 수 없다(1.15.5).

하나님의 형상을 신성과 혼동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 외에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개념을 별도로 다룬다. 그러나 성경의 용례는 형상(~l,c,, eivkwn, imago)과 모양(tWmd., o`moiosij, similitudo)을 구별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용된 형상과 모양은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병행하는 말들이 한 의미를 지시하며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히브리어의 흔한 표현법이다. 성경에서는 형상과 모양을 서로 바꾸어서도 사용하고(창 5:3), 형상을 대표로 칭하기도 하고(창 1:27; 9:6; 골 3:10), 모양을 대표로 칭하기도 한다(창 5:1; 약 3:9 ‘o`moiosij’). 그러므로 형상과 모양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두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신의 고유한 본성인 영에 속한 속성들을 인성 가운데 부여해 주셨다. 그리하여서 사람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으로서 대권을 행사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짐으로써 이성적이고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그 온전함(integritas)을 의미한다. 아담은 처음에는 올바른 오성을 충만하게 소유하였고 이성의 한계 내에 자신의 정서를 종속시켰으며 모든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탁월함(sui excellentiam)을 자신을 지으신 분에 의해서 수여된 놀라운 은사들로 돌렸다.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primaria sedes divinae imagines)가 가슴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들에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는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의 얼마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1.15.3).


타락 전 인류는 이렇듯 온전한 상태에서 조성되어 자기가 원하기만 하였더라면 자신의 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담은 자기가 원하지 않았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posse non peccare, to be able not to sin)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로 타락하였다. 아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의지 즉 자유의지(arbitrium liberum)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그 가운데서의 순종을 통하여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다. 자유의지 가운데서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찬양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생기(hm'v'n.)로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은 생기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미토록 하기 위함이셨다(창 2:7; 시 150:6).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을 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에 따라서 인류에게 자신의 형상을 주셔서 그 가운데서의 순종을 통하여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인내의 힘을 주셔서 그를 붙드시지 않으신 것은 오직 그 분의 ‘계획(consilium)’ 속에 감추어져 있다(1.15.8).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서 온전하게 짓기로 작정하셨으며 그렇게 하셨다. 최초의 인류는 온전하였으므로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의지로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나누어서 형상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인류의 자연적인 상태로서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양이 덧붙여져야 한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잘못되었다. 그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상실한 것은 오직 이러한 덧붙여진 은사(donum superadditum)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 후에도 인류는 하나님께서 처음 인류를 짓고자 하신 그 상태 즉 형상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들은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상실한 이 덧붙여진 은사를 원의(iustitia originalis)라고 부른다. 이러한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하면 최초의 인류가 온전했음도 그들이 전적으로 타락했음도 그들이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도 모두 부인된다. 그들은 구원을 처음부터 그렇게 작정된 불완전한 인류가 완전해지는 일종의 진화적 과정으로 여길 뿐이다(1.15.4).


2. 영혼,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한 좌소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다. 영혼은 ‘불멸적이나 피조된 실체(substantia immortalis, creata)로서 사람의 보다 고상한 부분’이다. 영혼은 ‘육체와는 분리되는 본질적인 그 무엇(essentiale quiddam)’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은사들이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으며 그것은 ‘신적인 그 무엇(divinum aliquid)’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들은 영혼이 ‘불멸하는 본질(immortalis essentia)’을 가짐을 증언한다. 영혼은 육체의 밖에서도 영원히 사는 실체이다(1.15.2).


영혼은 단순히 관념이거나 모종의 힘이거나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형체(形體)가 없는 실체(substantia incorporea)’이다(1.15.6). 성경은 영혼이 실체임을 반복해서 제시한다.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 죄가 머무는 곳이다(고후 7:1).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벧전 1:9) 영혼에 거슬리는 육체의 정욕을 다스려야 한다(벧전 1:9). 하나님께서는 영혼까지도 멸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마 10:28; 눅 12:5). 그러나 그 분께서는 우리의 ‘영의 아버지’가 되시며(히 12:9)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다(벧전 2:25). 영혼의 실체와 실재를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오류가 분명하게 지적된다(행 23:8). 사람의 불멸성이 영혼의 실체에 있다(1.15.2).


칼빈은 1534년에 재세례파의 영혼수면설을 반박하면서 쓴 글(Psychopannychia)에서 영혼은 언제든지 실체로서 활동함을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그곳에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으므로 사람의 사람됨이 영혼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서 사람의 영혼은 육체로 말미암아 살아서 활동하게 되므로 사후 영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단지 잠잔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사람의 실체가 본질적으로 영혼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구원의 은혜도 영혼을 살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최초의 인류가 받은 ‘산 영’은 이제 ‘살려주는 영’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된다. 구원이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형상(perfectissima Dei imago)’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자녀 된 자로서 그와 함께 후사됨에 있다(롬 8:9, 15, 17).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부음 받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의 온전한 회복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한 좌소로서 영혼의 속성은 이성, 양심, 그리고 의지로 나타난다. 영혼은 이성적, 도덕적, 그리고 자율적인 인격적 실체이다.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과 종교의 씨앗 그리고 양심이 영혼에 새겨져 있다. 영혼은 감각하고, 인식하며, 이해하고, 의지한다. 영혼의 근본적인 기능은 ‘오성’(intellectus)과 ‘의지’(voluntas)로 이루어진다. 오성은 선악과 정사를 분별하며 의지는 오성의 판단에 따라서 행함으로 나아가고자 결단한다.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오성도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도 모두 상실했다. 하나님 자신과 그 분의 뜻을 아는 지식조차도 스스로 얻을 수 없으니 ‘지식에 까지(eivj evpignwsin)’ 새롭게 하심을 입어야 한다(1.1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