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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3)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엡1:19-23) /김복철강의안

새벽지기1 2016. 3. 23. 12:37

(1:19-23)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사도의 세 번째 간구를 살펴 본다.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임”--- 사도는 그들에게 능력이 주어지도록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안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도록 해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능력보다는 성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신학과 교리의 문제가 되며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관한 상이한 두 가지 관점을 야기한다. 한 관점은 구원이란 내가 행한 것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능력의 결과로 보는 것이고 다른 관점은 내 안에서 또 다른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 결과로 보는 것이다. 표준 개정역(RSV)에서 사도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면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객관적인 확신은 주관적인 확신을 가지게 할 것이다.

 

사도는 위대한 목자적 충정으로 에베소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주 예수를 신뢰하며 성령에 의해 인침 받았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가 다루는 주제는 우리를 향하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이다. 그는 그 능력을 묘사함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가장 높은 권능의 자리에 앉아 계심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의 머리가 되셨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교리 전체를 한 개의 그릇에 다 담아 받는 격이 되었다. 이제 사도는 에베소서 2:1에서 그가 원래 다루려던 주도적인 주제를 다시 다룬다. 그 주제는 첫째는 능력의 위대함 자체이며 둘째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위대한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지를 확신케 되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기독교의 구원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발현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기간에 의심과 불확실성과 주저함이라는 고통 가운데서 지내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 위대한 근본적 교리를 먼저 파악하지 않은 데 있다는 점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없다. 하나님만이 그리스도인 되게 하셨다. 이것이 세 번째 간구의 실질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이 점을 보증하는 구절들을 숙고해 보겠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16). 사도 바울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복음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1:16) 다시 사도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고전1;24)가 된다는 것을 그가 확신하기 때문이며, 바울의 눈에는 성령의 나타냄, 능력의 나타남으로 하지 않은 설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1:5)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라(2:10)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함이라(1:6)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 사도는 전도(설교)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1:29)

 

우리로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가장 완벽한 표현은 사도가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한 것이다(고후5:17). 그리스도인은 새롭게 지음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을 지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곧 하나님 밖에 없다. 신약성경의 전체의 가르침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먼저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 새로이 남, 중생의 개념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묘사하기에 적합한 용어가 전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의 시작이요 마지막이다. 모든 것이 그와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두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하여 생각한다. 사도는 그것을 묘사하면서 최상급 위에 최상급을 겹쳐 말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로는 그러한 일을 표현하는 데 전적으로 부적합하다. “훨씬 능가하는” “지극히 크심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그 말들에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아야 한다. “역사하심보다 활동력이 더 좋다. “활동력이 훨씬 강한 말이다. 그 다음에 이라는 말은 강력이라는 말을 생각하라. 바울의 말은 이기는 힘, 승리하는 힘, 그것에 항거하는 것을 완전히 정복하는 힘을 암시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이 능력을 불가능한 것은 없으신 하나님의 힘의 활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은 흠정역에서 능력(power)이라는 말로 표현한 말이다. 그 말은 전능하심”(mighty)이라는 말을 대신한다. 하나님의 힘,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진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고유한 능력을 의미한다. 그 능력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바다에서 나온다. 결국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무한한 능력을 말한다. 이사야 선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의 선지서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누구와 비기겠느냐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40:22) 그는 우상들과 대조한다. 또한 세상 권세자들과 대조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여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도 하나님께 충고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힘과 능력과 권능이 충만하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 무궁토록 전능하신 능력이 바로 우리 안에서 행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는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힘의 강력의 활동력을 알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강력하게 역사하심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의 마음은 그 모든 것의 장엄함과 거대함에 머리 숙인다. 하나님의 능력의 광대함은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실 적에 객관적 방식으로 나타낸 바 되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생각해 보자. 어찌하여 사도는 창조의 능력을 말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가? 어찌하여 하늘 문이 열리고 모든 샘의 근원이 터져 모든 것이 다 물로 덮혀 버린 노아 홍수보다 더 하나님의 능력의 광대함을 나타낸 것이 있었던가요?

 

어찌하여 사도는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과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이적을 행사하여 탈출시킨 일들을 말하지 아니하는지요? 홍해를 가르고 요단을 가르며 건너게 하지 아니하셨는가? 어찌하여 사도는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들어 말하지 않고 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들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예증하고 있는가?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낸 최고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장애와 모든 원수를 이길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주님의 부활이기 때문에 사도가 이 사건을 들어 말하는 줄 믿는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날 예루살렘 교회의 서광이 비치는 곳에서 전한 첫 번째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24).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과 죄인됨과 방황함에 더하여 최후의 원수는 사망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26, 56-57). 사망과 지옥과 사단이 모두 정복 되었다.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이제 우리는 바울과 같이 말해야 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