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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2)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엡1:18)/김복철강의안|

새벽지기1 2016. 3. 22. 20:45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사도는 우리 마음의 눈을 성령께서 밝혀 우리가 받을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모세가 느보산 위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듯이 자주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현대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과 다른 세계를 강조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저 기독교 자체만을 믿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관점은 19세기 말엽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중동의 어느 나라에 살던 어떤 늙은 여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 여자는 어느날 두 개의 통을 옮기고 있었다. 하나는 불을 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물을 담고 있었다. 물었더니, 하늘을 태우기 위하여 불을 나르고 있으며 지옥불을 끄려고 물을 나르고 있노라고 대답하였다.

 

기독교는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어서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는 종교가 아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세상이 알았던 가장 큰 은혜를 끼친 사람들에 관한 목록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먼저 바라보고, 그런 다음 그것에 비추어서 자신들을 현세계에 적용시켰다. 그것은 역사 전체에 해당되는 진리이다. 병원은 성도들에 의해서 처음 존재하게 되었다. 사람과 인생을 영원이라는 빛에 바춰 본 사람들이 언제나 인간의 고통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 영적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위대한 개혁을 하였다. 병원이나, 교육, 문화, 산업상의 활동, 그와 같은 것들이 성자다운 사람들에 의해서 존재케 되었다.


존 칼빈만큼 이 세상의 삶을 고상하고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에 관심을 쏟은 사람은 없다. 이야말로 민주주의 역사의 동인과 같은, 가장 큰 힘이었다. 퓨리탄들은 영국의 위대함을 닦아 놓았다. 저 위대한 올리버 크롬웰보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빛 가운데서 살아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위대한 개혁자요 일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위대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보좌관들과 청교도들이 다 그러했다. 가장 위대한 세속적 개선은 언제나 영적인 부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8세기 복음적 각성이 영국을 프랑스 혁명과 같은 와중에서 구하였다. 노동조합도 복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활동으로 존재케 되었다는 것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노동조합정신은 마르크스보다는 메도디스트주의자에게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지난 3,40년 동안 사람들은 이 세상만을 강조하여 왔다. 사람들이 내세를 잃고 현실 생활에만 집착할 때 이 세상은 일종의 산 지옥이 되어 버린다. 혼돈, 무법과 부도덕과 악의가 판을 치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진실로 존중하는 사람들만이 이 세상은 다음 오는 세상에 대한 대합실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충만하고 보상있는 삶을 영위하고 싶으면,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묵상해야 한다. 그 묵상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안을 줄 수 있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8:18).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우리를 위안하는 것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계속 싸움을 해나가도록 격려하고 자극을 주는 것은 바로 이 지극히 중한 영원한 영광이다. 그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 영위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어디 있는가? 영광을 묵상하는 것은 성결에 이르는 고속도로이다. 우리 주님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부단하게 땅엣 것이 아닌 하늘 위의 것에집중시키며, 그것을 향하여 우리 생각의 나침반의 바늘을 맞추어야 한다. 참된 영성을 가름하는 시금석이다.

 

그 영광은 너무나 기이하고 놀랍고 완전한 나머지 우리 인간의 언어로는 참된 개념을 전달할 수가 없다. 다만 그 영광의 풍성이라는 표현으로만 나타낼 수 있다. 그 영광의 중심적인 핵심은 우리가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14:1-3)“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7: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귀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도 보지 못할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에 비추어 삶을 살아가자. 그리고 그것을 알았던 사람들같이 이 세상의 삶을 최선으로 살아가자. 최선을 다하여 지나가는 시간 세계속에서 선한 일을 하려애를 쓰자.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행하신 바와 같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