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정희교수

[한밭춘추] 카쉬에서 테레즈 데케루까지

새벽지기1 2015. 10. 17. 03:36

 
 

사진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한 가지는 사진을 찍는 순간 현재를 과거의 그 무엇으로 변화시켜놓는 것이라면,

다른 한 가지는 대상에 영원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스냅사진이 사라져버린 과거의 그 순간을 보여준다면

포트레이트는 사진을 찍는 대상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영원한 존재로 창조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과 가족들의 모습을 남긴다.

원시시대에 유한한 인간의 운명을 영원불멸의 것으로 만들고자 동굴에 이미지를 그려 넣었던 것처럼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벽에 건다.

 

포트레이트는 단순히 인물을 찍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한 시대의 삶의 모습과 한 인간의 사유가 드러난다.

특히 예술가의 초상을 찍는 데는 더더욱 감성과 지성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예술가들 내부에 간직된 예술적 성취와 깊이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사진가들에게는 부단한 감성의 훈련과 지성이 필요하다.

절대적인 자유를 열망하는 이 특별하고도 예민한 예술가들의 모습자체가 또 하나의 예술품이다.

 

인물사진에 있어 유섭카쉬는 독보적이다.

그는 20세기의 세계적인 인물들의 초상을 찍었다.

인물사진은 영혼을 담는 작업이다.

인물을 어떻게 접근해 어떤 구성으로 담아내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진다.

카쉬의 사진은 일반적이지 않다. 첼리스트 카잘스가 프랑코 독재정권에 저항의 표시로

고국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에 머물렀을 때,

카쉬는 텅 빈 수도원에 돌아앉아 첼로를 연주하는 카잘스의 모습을 담았다.

위대하고 외로운 예술가의 영혼이었다.

 

카쉬는 조명을 통해 인물의 고귀한 면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멕시코의 낡은 고택, 벽에는 세월의 바람에 뼈만 남은 소의 머리가 장식돼 있고,

바닥에는 말라비틀어진 고목이 덩그렇게 놓여 있는 공간에서 노년의 조지아 오키프를 찍었다.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이 황량한 공간에서 그녀의 견고한 지성과 예술혼은 아름답게 빛난다.

검버섯과 주름이 가득한 섬세한 손과 단정한 입매, 검은 옷의 실루엣은

그녀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말해준다.

 

카쉬는 한 인물이 겪은 슬픔과 절망마저도 우아하게 드러낸다.

내가 '테레즈 데케루'를 만난 것도

순전히 카쉬가 찍은 프랑스의 작가 모리악 사진 때문이었다.

창문에서 비쳐오는 실루엣으로 처리한 어둠속의 모리악은 고결해 보였다.

모리악 때문에 테레즈데케루라는 한 고독한 인간을 만난다.

예술의 강가에서 만나는 끝없는 인연이다.

 

이정희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