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정희교수

꽃중년의 하이퍼리얼리즘

새벽지기1 2015. 9. 26. 08:11

시대를 빛낸 세계적인 사진작가 중에는 사진을 전공으로 선택한 사람들보다는 다른 전공을 하다가 건너온 작가들이 많다.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문학이나 철학을 하던 사람들, 특히 지식인 그룹인 법률가였거나 의사였던 이들이 사진작가로 거듭난 경우가 꽤 많다. 지성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호기심의 촉발인자인가. 지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일수록 끊임없이 앎의 에너지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려 한다.

사진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1839년 사진의 발명 후 열렬한 환영과 함께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세상의 틀을 뒤바꿀 혁명적인 매체로 평가하였는가 하면 시인 보들레르는 상상력보다는 기술에 의존하는 저급한 예술매체로 매도하여 사진은 미술관의 문턱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그러나 현대사진의 위상은 달라졌다. 예술에 대한 틀을 바꾸어버린 마르셀 뒤샹 이후 사진은 개념미술, 미니멀아트, 팝아트, 퍼포먼스, 대지예술, 그 밖의 수많은 현대예술에 있어 매우 중요한 매체가 됐다.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사진은 가장 문학적인 미술'이라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사진은 지극히 서사적이다. 한 장의 사진을 보자.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가. 다큐멘터리사진이든 심상사진이든 감정을 배제하고 피사체의 본질만을 제시하는 객관적 사진이든 사진에는 수많은 이야기의 단초들이 담겨있다.

독일의 베허부부는 지극히 객관적인 사진을 찍었다. 추상적이거나 개인적인 내면세계의 표현을 거부하고 수평앵글, 균일한 흑백톤을 위한 흐린 광선의 사용, 무배경이다. 긴 노출시간으로 배경에는 피사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보지 못하는 그 무엇을 보게 해준다. 눈으로 보여지는 세상 너머의 초현실적인 느낌을 경험하게 해준다.

70대 포토에세이 수강생 한분이 밴드 소식란에 올렸던 '대전 시립미술관 하이퍼리얼리즘'전시에 다녀왔다고 한다. 하이퍼리얼리즘은 사진과도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수강생들이 많이 찾아갔다. 너무나 극사실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환영'을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사진과 비슷한 면이 있다. 누구랑 다녀오셨나 물었더니 아내와 함께란다. 70대에 하이퍼리얼리즘 전시장이라니, 아름다운 꽃중년이다. 사진만이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사진은 가장 민주적이며 보편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맞아주는 예술의 꽃이다. 이정희 사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