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정희교수

레비나스에게 희망을 걸다

새벽지기1 2015. 6. 30. 13:09

레비나스에게 희망을 걸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미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에 시비와 원망이 없이 하라" (립립보서 2장 12~14절)

 
주일 날 아침, 수백 명이 거룩한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채플룸에서 식당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 말씀들은 유기되었다. 우리는 조직 교회 속에서 조직원으로 앉아 영혼없는 말을 나누고 집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봉사활동을 위해 선교단원을 모집하는 광고, 교회와 학원을 위해 기도에 동참할 날짜와 시간을 적으라는 기도계획서, 그러나 이 모든 것에 겸손과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며 산을 옮길만한 능력이다. 성령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랑의 역사없이는 이룰 수 없는 거룩한 공동체,,,, 집으로 오는 동안 차선을 변경해야 하는데 형편없는 고물차 한대가 바싹 붙어서 계속 비껴주지 않는다. '나쁜 자식' '흠!'  난 거룩한 모양만 있는  교회에 이미 화가  났던 것 같다. 

 
언젠가 메모해둔 레비나스의 글을 꺼내 보았다. 타자에게서 나의 존재 이유를 찾았던 실존주의 철학자. 무수한 폭력과 살인과 인간의 냉혹함 앞에서 모든 가족을 잃고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절대자 하나님을 통해 삶의 본질을 마주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상처가  '타자로의 철학'을 쓰게 했다.   

  
레비나스는 나에게 흡수 될 수 없는 절대 고유한 '너'가 있다는 것, 또한 너에 대해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이 내 주체성의 근본이라 생각했다. 인간은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 , 욕구하는 것들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고 나에게 종속시키려 든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구는 나를 위해 오로지 나 자신에게 전념한다. 인간적 욕구에 따라 세상을 즐기고 주관하는 삶의 방식, 나 자신에 몰두하여 끊임없이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존재양식을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사는 처세이며 지혜라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이 그러한 존재양식에 머문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미물들처럼 다만 일하고 먹고 살아가기 위해 살아갈 뿐이다.

  
 레비나스는 말한다. 타자에 대한 사랑없이는 신에 대한 사랑도 불가능하다. 타자의 얼굴은 곧 신의 계시이며 신의 현시이다. 인간 소외가 발생하는 것도 서로의 얼굴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타자의 얼굴은 소통의 근거이다. 타자의 얼굴 속에 신이 숨어있고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윤리가 존재하며 자아의 근거가 거기에 있다.

 
그는 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신을 통해서 정의하고자 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신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내가 신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하고자 할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나는 위대하고 전능한 현존(existence)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신의 추상적인 관념은 인간적 상황을 명백하게 해줄 수 없다. 인간적 상황만이 신의 관념을 명백하게 해분다." 신은 신 그 자체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의미있는 것이 된다. 교회나 이기적 욕망을 담은 기도 속에서가 아니라 먼저 고통받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신은 찾아온다.  

 
 그의 이런 사상 밑바닥에는 개인적인 고통이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족들을 모두 잃은 그는 '타자를 나에게 흡수시키려는 전체주의 속성을 가진 서양철학'을 자각했다.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잊어버리고 타인을 나의 영역 속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는 서양의 존재론적 구조에서 생겨날 수 밖에 없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는 존재라는 벽에 갇혀있는 존재론에서 비롯되는 고통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관념 속의 막연한 죽음이었지만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이라는 현실에서 실제 죽음을 경험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관념론을 넘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재성을 가진 존재자(인간)로 새롭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하이데거의 시간성도 비판한다. 존재의 본질은 죽음을 향한 존재가 아니며 존재자는 존재의 재현을 위한 무대위의 배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살아있는 실존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마지막 과정일 뿐이며 죽음의 현상은 인간의 인식밖에서 찾아오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은 살아있는 실존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근원이 아니다. 죽음은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존재의 미래를 열게 하는 알 수 없는 불가능성이다.  

 
 레비나스는 헤브라이즘에서 말하는 성서의 신과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는 철학적인 사유로서의 신을 구별했다. 성서의 신은 인간이 사유를 뛰어 넘어 존재한다. 레비나스는 철학적인 이성의 권력으로 신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을 비판한다. 성경속의 야훼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사유를 초월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되는 신의 실체를 부정한다.그가 이해하는 성서속의 신은 신성한 삶의 공간 속에서 인간을 초월적으로 지배하는 주권자이며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신앙적으로 의지했던 신이며 성서의 학습을 통해 인간에게 밝혀지는 초월자로서의 신이다. 

 
  너와 사랑에 빠진 나는 자발적으로 너에게 갇힌 자요 너의 볼모가 된 자다. 사랑에 빠진 나는 사랑을 가능케 하는 호르몬이 작동하는 동안에 너를 위해 산다. "존재 안에서는 겸손이고 시듦이며 어리석음이지만 존재를 넘어서는 탁월이며 높음"이다. 나는 너를 환대할 뿐 아니라 너에 대한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타자는 나에게 법이며 명령이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은 나를  '타인의 고통을 짊어진, 고통받는 의인,  대속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밀고 올라간다.   

 


YouTube에서 '소원 - 꿈이있는자유' 보기
https://youtu.be/KXmwsXL05p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