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정희교수

일야 청천별곡

새벽지기1 2015. 10. 10. 09:48

[한밭춘추] 일야 청천별곡

내게 역마살이 끼어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 명절 지리산 둘레길에 다녀오자마자 연이은 연휴에는 초등동창들 십여 명과 대천 바다로 여행을 갔다.

천북면 사오리라는 주소지 말고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곳이었다.

어디 머나먼 카자흐스탄 고려인 마을 같다.

검푸른 하늘에 휘영청 높이 뜬 반달, 두 개의 황색등이 서있는 바닷가,

키 큰 포플러나무 몇 그루가 바람에 일렁인다.

어둠 속에 바다는 보이지 않고 파도소리만 들리고 수천 개의 별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일야청천별곡이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에 카메라를 꺼낼 수가 없었다.

 

떠나기 전에는 바다풍경 장노출 사진을 계획했지만

이 투명한 검은 어둠, 달빛 소나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할 말을 잃을 때는 침묵이 필요하다.

그냥 가슴에 담아 두기로 하자.

어린애같이 친구 하나가 그네를 탄다.

그리운 친구도 만나고 사진을 찍겠다는 계획은 생각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대로 미끄러져 버렸다.

호방한 박지원도 이랬으리라.

여행을 떠나야 하는 오후 5시가 가까워지는데도

책을 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만든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쫄깃쫄깃한 이 깊은 맛,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열하일기'를 이렇게 재해석할 수 있다니.

고미숙씨가 쓴 '유쾌한 시공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넘나들면서

연암이 얼마나 유쾌한 천재인지 그의 삶에 넘쳐흐르는 자유란 어떤 것인지,

그의 사유의 세계가 얼마나 즐거운 세계인지 신이 났다.

 

열하일기는 최고의 여행기였다.

열하, 그 이질적인 공간에서 연암은 낯선 그들과 새롭게 접속하고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사유의 장을 열어간다.

얼마나 유쾌한 여행인가. 사진은 여행의 존재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감동어린 스펙타클과 깨달음을 경험하게 되듯이

렌즈 속에서 마주치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것들 속에서 사진가는 수많은 이야기를 끌어낸다.

 

사진의 세계는 놀랍다. 사진가는 사진을 찍기 전에 수많은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정작 셔터를 누르고 나면 마음속으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풍부한 세상이 드러난다.

여행을 떠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의미를 만나는 것처럼.

온갖 목소리들이 섞여드는 저잣거리에서 친구를 찾고,

진심어린 우정과 지성의 교집합의 가능성을 보여준 연암,

언제나 싱싱한 것들을 열망했던 연암의 여행기처럼 나의 좌충우돌 여행기도 유쾌하기를.

이정희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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