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3070

죄 (3)(막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5) 본문에 나오는 ‘죄’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의 번역입니다. 그 단어는 “빗나가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목표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겠지요. 성서의 차원에서 죄는 단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실증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과 성서의 많은 규범들을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실증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구약 중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여호수아는 난공불락의 요새였..

죄 (2) (막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5) 예수님에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장애와 난치병과 같은 불행을 죄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천성 시각장애인을 보고 그의 불행이 본인의 죄냐 부모의 죄냐 하고 물은 제자들도(요 9:2)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욥기서에서도 비슷한 구도로 설명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연재해를 당하거나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일,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일들은 우리가 아무리 조심..

죄 (1) (막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5)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죄 많은 여인을 향해서 사죄를 선포한 경우는 있지만(눅 7:48) 장애나 난치병을 고치실 때는 “깨끗함을 받으라.”든지 “네 손을 내 밀라.”는 명령을 내리실 뿐이지 사죄를 선포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 사죄선포는 아마 초기 그리스도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메시아로 신앙고백을 한 이후에 발생한 전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사죄 선포는 메시아의 업무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도 이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일시를, 즉 권위의 동일시를 전제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서 텍스트를 이렇게 분석하는 것..

그들의 믿음 (막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5)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운명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붕에 구멍을 내면서까지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사람들의 행동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느낄 뿐만 아니라 나름으로 그런 불행에 동참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행동은 없습니다. 그런 행동은 인간 치유라는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어떤 거창한 세계관이기보다는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의 불행에 연대하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그런 연대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

구멍 난 지붕 (막 2: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막 2:4) 중풍병자를 들것으로 옮겨온 네 사람은 예수님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거처하신 그곳은 그야말로 만원사례입니다.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자리를 내 줄 수 없으니 사람들이 많다고 늘 좋은 것은 아니군요. 이 사람들은 지붕 뒤로 올라갔습니다. 마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냈다고 하네요. 유대인들의 집이 그렇게 순식간에 지붕을 뜯어낼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다는 건지, 아니면 이들의 극성이 대단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상황이 아주 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는 이 장면은 마치 키가 작아 사람들 뒤..

중풍병자 (막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막 2:3) 중풍병자 치유 이야기가 3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들것에 실려 온 이 사람의 이름은 없습니다. 본문의 중풍병자에게도 원래 이름이야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그 이름이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가가 생략한 것 뿐입니다.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름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건 비극입니다. 개똥이, 쇠똥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던 옛날에 비해서 오늘은 아무리 가난한 집 아이라고 하더라도 고유한 이름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익명성은 여전합니다. 아니 현대인들은 자의에 의해서 익명성 뒤로 숨는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익..

“도”(막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막 2:2) 본문 막 2:1-12절은 그 유명한 중풍병자 치유 사건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지금까지 진행된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런 특별한 사건과만 연루되어 있습니다. 이런 진행에서 볼 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도를 말씀”하셨다는 진술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신약학자들은 이 진술을 마가의 편집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중풍평자 치유 전승에 없던 구절을 마가신학의 필요에 따라서 여기에 삽입했다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성서가 편집된 것이라는 주장 앞에서 당혹스러워하기 일수입니다.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흡사 잡지와 신문처럼 편집 운운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성서를 귀하..

많은 사람 (막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막 2:2)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마가는 문밖 마당에도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1:32-34절에도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번에는 두 번째 방문인 탓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표현은 마가복음의 특징인데, 예수님에게 무언가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의미겠지요. 우리가 앞의 과정을 전제한다면 이 사람들의 호기심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 병 치유와 축귀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신앙을 절대화할 필요도 없지만 냉소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

집에 계신 예수 (막 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막 2:1) 예수님이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가버나움 출입이 비교적 잦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문 집이 시몬과 안드레의 집(막 1:29)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한 사람의 집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그런 익명의 사람들이 제법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제공한 주인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신앙고백을 진술하는 중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밝힐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어쨌든지 예수님은 유대 지역으로 가실 때 베다니의 나사로, 마리..

가버나움 (막 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막 2:1) 나병환자 치유사건 이후로 외딴 곳에 머물러 계시던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몰려들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것인지, 아니면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 지도자들이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확신이 섰는지, 또는 예수님의 고유한 영적인 시각으로 어떤 때를 감지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게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하기는 했지만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있어야 할 자리는 자신의 영성을 정화하는 광야, 사막 같은 은둔처가 아니라 민중들이 시끌벅적하게 살아가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