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5)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운명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붕에 구멍을 내면서까지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사람들의 행동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느낄 뿐만 아니라 나름으로 그런 불행에 동참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행동은 없습니다. 그런 행동은 인간 치유라는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어떤 거창한 세계관이기보다는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의 불행에 연대하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그런 연대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묵상에서 몇 번 짚은 적이 있지만,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자,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 장애인, 빈곤층 사람들, 편모 편부 어린이, 알코올 중독자, 죽음에 임박한 사람 등등,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진정한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삶에도 평화와 기쁨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당연히 ‘앙가주망’(참여)이 따라와야겠지요.
그러나 오늘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은 단지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으로 한정되는 생각과 행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떼어놓고는 무의미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은 단지 용한 점쟁이를 찾는다거나 실력이 좋은 의사를 찾는다는 심정이라기보다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메시아적 징표의 사건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메시아적 희망을 읽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믿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적 희망을 발견했다는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단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예수님에게 몰려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사람들의 믿음이 반드시 그리스도론의 구도 안에 완벽하게 들어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건을 전승으로 담아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입장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관계된 사람들의 행위와 믿음을 그리스도론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아무리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긴장 안에서 살아갑니다. 보편적인 휴머니즘과 그리스도교 특유의 그리스도론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을 우리는 놓칠 수 없습니다. 20세기 초 스위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사회주의는 이런 긴장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강력한 휴머니즘 운동인 사회주의 앞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인간의 인간다움을 고취하는 일과 직결시켰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한국교회를 향해서 그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볼 때 사회변혁 단체가 아닙니다. 복지사회를 꿈꾸는 단체도 아닙니다. ‘국경없는 의사회’ 같은 평화주의자들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기희생을 담보하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절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가 휴머니즘을 유보해도 괜찮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중풍병자를 고쳐야 한다는 열정이 없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휴머니즘은 예수 사건에 의해서 계속 상대화되어야 합니다. 이럴 경우에만 휴머니즘은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을 담을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이 휴머니즘의 주인임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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