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2주, 2025년 3월 16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유일신교의 대표 격인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여럿입니다.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과감하게 고향을 떠났다는 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그가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일도 쉽지 않았고, 자식을 바치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미쳤다고 생각했겠지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인신 제사를 원하신 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라고,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시험을 버텨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삭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름이 아직은 아브람으로 불릴 때 그는 하나님 여호와를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창 15: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임했다.’라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천사를 본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가 경천동지할 어떤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깨달음이 잘못되면 사이비 교주에게서 보듯이 망상이고, 바른 것이면 선지자들에게서 보듯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작곡가들도 음악을 환상 중에서 듣고, 화가들도 어떤 이미지를 환상 중에서 보고, 시인들도 시적 언어를 환상 가운데서 경험합니다. 그런 경험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그쪽의 세계로 깊이 들어갔을 때만 주어집니다. 예술적 영감이 오랜 훈련을 통해서 주어지듯이 하나님 말씀 경험도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에 밀착했던 사람이기에 이따금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은 곧 아브람이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했을지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는 오래전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과 아내 사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중간 기착지인 하란에 머물렀다가 아버지 데라가 세상을 뜬 뒤에 하란을 떠나서 여기 가나안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몇몇 곳을 거쳐서 헤브론에 자리를 잡고 상당한 재력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식이 없으면 자기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을 등진 아브람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듯합니다. 그는 하인 중에서 신실한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을 생각이었습니다. 2절에서 아브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으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는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끌고 나가서 하늘의 별을 보라고 했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러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합니다.
믿음의 본질
우리는 믿음을 종종 오해합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주시라.’라고 매달립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또는 사업이 부도 직전이라고 합시다. 기도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체적인 어려움을 해결해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마땅히 드려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죽음의 잔을 물리쳐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핵심은 어떤 문제가 해결되느냐 않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느냐에 있습니다. 아브람도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는 사실 자체를 믿은 게 아니라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때만 아브람처럼 여호와를 믿을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현대인들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에만 매달리기에 여호와를 믿기 힘듭니다. 종교 경험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과자를 먹을 때만 엄마의 사랑을 느끼는 거와 비슷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달콤한 과자에 마음을 종종 빼앗기기는 하나 실제로는 엄마만이 그에게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요즘 어른들은 끊임없이 과자만 찾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도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벌어지는 일을 중심으로 교회 생활을 이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 직분이 하나의 예입니다. 안수 집사, 권사, 장로가 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에는 아무 관련성이 없는 것인데도 거기에 모든 걸 걸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문제로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거꾸로 우리 교회에서는 나이가 든 이들을 명칭만의 권사와 장로로 부르는데도 극구 사양하기도 하고, 마지못해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보다도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만족해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활동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난 특징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아브람의 하나님 경험은 1절과 4절에 나오는 표현처럼 ‘여호와의 말씀’(데바르 야웨)입니다. 말씀이 오는 일은 드물기도 하고 정말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너무 낯설어서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경험입니다. 비유적으로 우리가 숲길을 걷는 중에 나무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놀라서 넘어지겠지요. 모세는 호렙산에서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 보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경험하는 일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쏟아지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사울은 땅에 엎어졌다가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어서 사람들의 손에 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깊은 잠
오늘 본문은 아브람의 하나님 경험을 12절에서 종교 문학적인 방식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아브람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는 말은 실제로 잠들었다기보다는 그의 일상적인 정신활동과 감각 활동이 멈추었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 경험은 이처럼 깊은 잠이라는 은유로 말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현상입니다. 일상에서는 여러 가지 계산서가 생각납니다. 복잡한 인간관계로 골치가 아픕니다. 남편 걱정, 자식 걱정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 경험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을 경험하면 깊은 잠에 빠져들 듯이 우리의 일상적 시시비비와 자기 걱정이 사라집니다. 자기의 실존을 초월하는 경험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독서삼매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에는 책 내용만 생각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경험이 드문 이유는 깊은 잠에 떨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정신이 말짱해서, 정확히 말하면 우리 정신이 자기와 세상일로 너무 혼란스러워서 하나님 말씀이 들어올 수 없는 겁니다.
깊은 잠에 빠진 아브람에게 큰 흑암과 두려움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경험입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밝음과 즐거움만 느끼고 싶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 경험은 흑암과 두려움입니다. 깊은 어둠과 공포입니다. 이를 종교학에서는 누미노제(Numinose)라고 합니다. 루돌프 오토가 처음 사용한 단어인데, 거룩한 두려움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섰을 때 피조물의 한계를 절감하는, 아주 특별하고 낯선 느낌입니다. 독일 중부 도시 쾰른에는 독일에서 가장 큰 고딕식 대성당이 있습니다. 방문객이 하나도 없는 어느 날 혼자 그 성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는데, 갑자기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들린다고 합시다. 거기서 오는 전율이 바로 누미노제입니다. 어떤 산악인이 혼자 8,850미터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고 합시다. 아무도 없습니다. 위로는 하늘만 보이고 아래로는 만년설로 뒤덮인 산 능선만 보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절감하면서 큰 두려움에 휩싸일 겁니다. 한 가지 예만 더 들겠습니다. 여기 어떤 젊은이가 친구들과 함께 춤추는 야간 업소에 놀러 갔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런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는 몸으로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영화에서는 보았기에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젊은이가 갑자기 그런 흥겨운 분위기에서 ‘내가 누구지?’라는 질문에 휩싸였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술 마시고 춤추면서 흥겨워하는 자신이 너무 낯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거기 모였으나 그는 철저하게 혼자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그 완벽한 고독에서 느끼는 정감이 곧 누미노제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큰 흑암과 두려움입니다. 이런 경험 없이 하나님 경험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론을 펼칠 것입니다. ‘나는 본래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라 세속적인 인간이다. 그러니 거룩한 두려움이나 큰 흑감 같은 거 생각하기 싫다. 그런 걸 생각하기보다는 그렇지 않아도 고달프면서도 짧고 짧은 인생이니까 실컷 즐기면서 살다가 죽겠다.’ 이렇게 산다는데 누가 옆에서 말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그렇게 사는 건 다른 동물도 다 하는 겁니다. 순간에 묶여서 사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당장 즐겁고 재미있는 게 최고입니다. 동물이라면 그렇게 사는 게 마땅하나 인간은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만이 순간이 아니라 역사를 생각합니다. 인간만이 자기의 실존을 뚫어봅니다. 인간만이 주변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의식합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언어를 구사합니다. 저는 지금 동물은 수준이 낮고 인간만 높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의 수준이 높고 낮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동물과 인간은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도 동물이 분명하지만, 동물과는 다른 동물입니다. 인간만이 자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배아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사실과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평생 의식하면서 삽니다. 자기가 완전히 소멸할 미래를 내다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작곡합니다. 인간만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때로는 출가 수도승의 길을 갑니다. 그럴 때만 인간의 인간다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만 내면의 세계가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일상을 제대로 생명 충만하게 누릴 수 있고, 영혼의 자유를 경험합니다. 오늘 21세기 현대인의 내면적 삶은 자기들이 원하듯이 실제로 풍성해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먹을거리와 짝짓기에만 숙명적으로 묶여서 사는 동물처럼 단조로워지는 건 아닐까요?
타는 횃불
오늘 설교 본문은 창 15:12절에서 몇 절을 뛰어넘어서 17-18절로 갑니다. 아브람이 큰 흑암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어떤 특별한 현상이 다시 일어났다는 겁니다.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연기가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아브람이 준비한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창 15:9)가 번제(燔祭)로 바쳐지는 장면입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종종 불로 나타납니다. 앞에서 짚었던 모세의 호렙산 이야기에 불이 나오고,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의 성령 강림 사건에도 불길이 나옵니다. 18절은 “여호와께서 아브함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언약의 내용은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땅 문제는 늘 예민합니다. 땅이 돈벌이의 수단이 되었기에 땅을 주겠다는 약속은 곧 부자가 되게 하겠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생명의 근본이고 토대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큰 흑암과 두려움에서 그는 이제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큰 흑암과 두려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생명의 약속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이게 정말 얼마나 놀라운 믿음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두려워했고, 큰 흑암과 두려움에 빠져들었다고 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경악스러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당신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었고,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벌어진 가장 큰 흑암이고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이와 달리 오늘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사탕처럼 달콤하게 여깁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했기에 죄 많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먼저 큰 흑암과 두려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이는 세상이라니, 의로운 자가 억울하게 죽는 세상이라니 우리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한다니, 이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나요. 큰 흑암과 두려움을 직면하면 이제 구원의 빛이 보일 겁니다. 어중간하면 죽도 밥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감하게 흑암과 두려움에 맞서 봅시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으시나요? 박테리아가 기다리는 무덤에 홀로 묻히거나 뜨거운 불길이 기다리는 화장터 화로 안으로 홀로 들어가는 여러분의 미래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끔찍한 공포의 순간에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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