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복과 화의 역설 (눅 6:17-26)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2. 19. 06:05

주현절 후 6, 2025년 2월 16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본 분들은 오늘 설교 본문인 눅 6:17-26절이 마 5:1-12절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겁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 구절은 소위 팔복이라고 불립니다. 병행구인 누가복음에는 여덟 개의 복이 아니라 네 개의 복과 네 개의 화가 대조 방식으로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산상수훈이지만 누가복음은 평지설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주제로 여러 번 말씀하셨을 것이고, 제자들이 그런 말씀을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전하다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형식으로 각각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두 본문이 형식은 조금씩 달라도 복에 관한 내용 자체는 똑같습니다.

 

가난의 복과 부의 화

 

본문이 말하는 네 개의 복 중에서 첫 번째 복은 가난입니다. 20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정언적으로 선포합니다. 성경 말씀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는 하나 실제로 가난한 삶을 복으로 여기기는 곤란할 겁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난하게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와 대립하는 구절은 24절입니다. 여기에는 부유한 자(rich)가 나옵니다. 요즘 슈퍼리치라는 말도 흔합니다. 부자에게는 화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재물이 주는 위로를 그들이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로와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도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문제는 그런 쏠쏠한 재미에 도취해서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가난한 자에게 주어질 하나님 나라가 닫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입니다. 이런 말에 현실성이 있을까요?

 

제 주변에는 부자가 없어서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부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지는 머리로만 알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어림짐작으로 100억 원 재산이 있으면 부자라는 말을 듣겠지요. 100억 원을 연 3%로 이자를 주는 은행에 맡겼다고 합시다. 이자만 3억 원이 됩니다. 이 사람은 불로소득으로 상류 10% 안에 들겠지요. 이런 단순 계산으로 하면 10억 원만 있어도 노후 걱정은 하지 않을 거 같군요. 돈이 많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돈을 관리하거나 쓸 생각으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일종의 재테크에 모든 신경을 쓰면서 사는 겁니다. 돈이 지배하는 인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위한 사회시설에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나, 그런 사람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부자는 아닙니다. 재산을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니까요.

 

예수께서는 재물의 위험성을 예상외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12:13-21에는 부자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유산 분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잘 지어서 대박이 났습니다. 이 부자는 곡식을 쌓아둘 곳간이 부족해서 걱정하다가 곳간을 허물고 더 크게 지어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지금도 예상외의 수익을 올린 기업체가 더 많은 곳에 투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부자의 속마음이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지금 우리는 옛날 사람과 비교하면 모두 슈퍼리치로 삽니다. 여러분 집 구석구석에 많은 물건이 쌓여있을 겁니다. 옷도 많고, 신발과 가방도 많고, 냉장고에 먹을거리가 쌓였습니다.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음식도 제법 있을 겁니다. 택배 물류가 유독 발전한 우리나라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모든 물건을 배달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그냥 호기심으로 사들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택배 포장지를 뜯지 않고 쌓아두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8:18 이하에는 부자 관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관리가 예수께 와서 영생을 얻는 길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지켰다고 자랑하는 이 사람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입니다. 그는 큰 부자여서 크게 근심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비유에서는( 16:19-31) 가난한 나사로가 죽은 뒤에 아브라함 품에 안겼으나 부자는 지옥 불에 떨어졌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이미 받았으나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산상수훈에 속한 마 6:24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부자의 운명을 위험하게 보고 가난한 자의 운명을 희망적으로 본 것일까요? 이런 생각이 옳을까요?

 

하나님의 나라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이라서 행복하다는 말과 부자는 위로를 이미 받았기에 불행하다는 말은 서로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먼저 부자의 삶을 보십시오. 부자는 재물이 제공하는 삶의 방식에만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돈이 제공하는 삶의 재미가 너무 강렬해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마약이 제공하는 황홀한 경험에 갇히기에 다른 삶을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산책과 독서와 음악 감상과 운동과 대화와 사회봉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돈은 마약이 아니라서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 여유롭게 산책도 하고 책도 읽고 운동도 할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한 마디로 돈이 있어야 교양 있게 살지 않느냐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돈이 필요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질의 여유가 문명의 동력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그런 문명과 교양으로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교양에 한정되면 한정될수록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대목을 성찰하지 않고 살면 하나님은 가물가물해지고 교회 생활의 교양에만 길듭니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이런 삶으로는 겉으로 아무리 세련되어 보여도 그의 영혼은 병드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은 부자들이 이미 위로받았기에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삶의 참된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게 자유로 나타나기도 하고 평화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쁨과 안식과 환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는 사랑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복이 있다거나 행복하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세요.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기쁨과 환희와 사랑이 풍성한 사람이 실제로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재물은 우리가 세상을 편리하게 살도록 도와줄 뿐이지 이런 근본적인 삶의 능력을 허락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돈이 많으면 독단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지중해에 면해있는 그 지역을 휴양지로 만들겠으며, 캐나다와 그린란드를 미국에 귀속시키겠다고 떠벌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보십시오. 최고 부자 나라이자 군사 최강국이라서 제멋대로 발언하는 겁니다. 그런 말은 미국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국내 정치적으로도 유리하다고 그는 생각하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을 받으려면 세상이 제공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두 개를 다 원합니다. 물질적인 세상이 주는 위로와 재미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으면서도 영혼이 자유롭고 풍성하며 사랑의 능력이 있는 인간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대충 흉내를 내는 수준에서는 가능하나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대중 설교자는 깨끗한 부자를 외쳤습니다. 형용모순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선전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완전히 대치되는 주장입니다. 적당하게 깨끗한 방식으로 부자가 될 수는 있으나 실제로는 깨끗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어떤 그리스도인 기업가가 고급 비프스테이크 레스토랑을 개업해서 대박을 터트렸다고 합시다. 다른 음식점보다 더 양심적으로 운영할 수는 있습니다. 근본에서는 비프스테이크 영업이 잘될수록 지구촌의 관점에서는 불행이 더 심해지는 겁니다.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하는 양질의 소를 키우려면 비싼 사료를 써야 합니다. 곡물값이 오릅니다. 아프리카 가난한 사람들은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형교회가 생기면 미자립 교회가 더 많이 생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긴 했습니다만 우리가 그저 흉내를 내는 수준에서는 세상의 물질과 하나님 나라를 함께 붙들 수는 있으나 근본에서는 오직 한 가지만 선택할 뿐입니다. 양자택일인 거지요.

 

우리는 언젠가 세상의 위로와 재미를 완전히 잃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재물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일전에 오래전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제 강의를 듣던 여학생이 순수 유기농 농사를 짓는 남편 목사와 함께 우리집을 찾아왔습니다. 대화 끝에 일 년여 전 이야기를 하더군요. 밭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응급실에 가게 되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도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로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병원비가 예상외로 많이 나와서 빚 갚는 계획이 엉클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마음이 평안해졌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평안입니다. 모든 걸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때 주어지는 위로이자 영원한 쉼입니다. 죽을 때 우리는 모두 그런 위로와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죽기 전 지금 여기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처럼 지금 여러분의 일상과 운명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완전히 맡기기가 말처럼 쉽지 않겠으나 방향이 그렇다는 사실만은 기억해 두십시오.

 

두 번째로 나오는 주린 자와 세 번째로 나오는 우는 자도 가난한 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지금은 배가 고프겠으나 앞으로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배가 고파야만 배부름의 의미를 압니다. 늘 입에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사람은 인간의 먹는 행위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를 잘 모릅니다. 우는 자는 슬퍼하는 자입니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웃을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곧 죽는다는 사실과 지금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어도 곧 영원히 헤어진다는 사실을 뚫어본 사람은, 즉 인간의 불안한 실존 앞에서 울 줄 아는 사람은 삶을 기쁨 충만하게 살아낼 것입니다. 현대인은 거꾸로 삽니다. 화와 불만이 너무 큽니다. 상대를 꺾어야만 직성이 풀릴 듯합니다. 자기가 지금 당장 웃을 일을 억지로 찾아 헤매는 방식으로 삽니다. 불행한 겁니다. 그래서 25b절에서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네 번째 복에 관한 설명이 아주 특이합니다. 22-23절을 들어보십시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 구절이 묘사하는 이들이 누구일까요? ‘인자로 말미암아 버림받은 사람들은 곧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팔복이 포함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제자들을 향한 말씀인 것처럼 여기 누가복음의 평지설교도 전체적으로 제자들을 향한 겁니다. 일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탓에 무시당하기도 하고 인생살이에서 각종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절하면 로마 제국의 공무원이 될 수 없었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당시에 벌어졌습니다.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이 비폭력이라는 신앙적 신념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청난 박해를 받은 거와 비슷합니다.

 

위 구절에 따르면 제자들의 삶이 행복한 근거는 지난 구약의 역사에서 박해받은 선지자들처럼 그들에게 하늘의 상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26절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들으면 오히려 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칭찬은 거짓 선지자들이 들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대중의 욕망을 자극해서 인기를 끄는 사람입니다. 일종의 선동가입니다. 오늘날 정치 용어로 바꾸면 포퓰리스트 정치인입니다. 대중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정치적 이들을 얻는 이들입니다. 히틀러가 그런 포퓰리즘의 대가였습니다. 그런 이들은 거짓 선지자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상이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에 평화와 안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지금 대한민국 교회에서도 비상계엄이 관련된 이 엄중한 사태 앞에서 목사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옳은 걸까요? 누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쓰는 자이며, 누가 신자들을 종교적으로 선동하는 자입니까? 복이 있는 사람과 화가 있을 사람을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요?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이미 대답이 들어있습니다. ‘하늘의 상이 무엇인지를 알 때만 복과 화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게 곧 하늘의 상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가난마저도 복이 됩니다. 세상에서 무시당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자 공동체 전통에 서있는 우리 모두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기쁨 충만하게 이 소란스러운 현실을 헤쳐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