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후 2주, 2025년 1월 5일
로고스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분도 있고, 없는 분도 있을 겁니다. 성육신을 한글로만 들으면 거룩한 육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한자로 이룰成, 살肉, 몸身이라고 해서 ‘육신을 이루었다.’라는 뜻입니다. 요 1:14이 여기에 해당하는 구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성육신 개념이 성경에 나온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가 세력을 떨쳤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다가 그의 인간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생각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지녔다는 사실은 어딘가 어색합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기교부들을 비롯한 그리스도교 주류는 예수의 인간적인 특성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거나 약화하려는 주장을 과감하게 배척했습니다. 그런 신학적 결기가 바로 성육신이라는 신학 용어로 자리를 잡은 겁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리스어 성경을 좀더 자세하게 보아야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할 때 ‘말씀’은 그리스어 로고스(Λόγος)의 번역입니다. 로고스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말, 질문, 명령, 교훈, 진술, 이유, 진리, 원리, 도 등등입니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이 바로 로고스입니다. 이 세상을 조화롭게 돌아가게 하는 근본 원리나 힘을 의미합니다. 신화를 가리키는 뮈토스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로고스가 있었기에 자연과학도 발전하고 법과 윤리와 도덕도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첫 구절인 1:1절에서 로고스를 태초 사건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이 문장은 철학책에 나오는 것이라고 해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겁니다. 들어보십시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는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ῇ)의 번역입니다. 아르케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처음, 시초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창 1:1도 ‘태초에’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창세기에서 나오는 그 태초가 예수님과 연결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로고스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더 나아가서 이 로고스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처음부터 아르케와 로고스 같은 복잡한 철학 개념을 끌고 들어온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현학적으로 만들거나 알쏭달쏭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예수의 정체성과 본질을 전하는 데에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하나이면서 인식론적으로 다른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게 바로 ‘성육신’이라는 신학 용어가 가리키는 핵심 개념입니다.
어떤 분들은 단순하고 명백해야 할 그리스도교 신앙을 왜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성육신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래 복잡하고 까다롭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아니라 사실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우리 시간과 공간에 갇힌 인간이 다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까다롭고 아득합니다. 작년 마지막 달인 12월에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큰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두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한 번은 12월3일 야밤에 벌어진 비상계엄 선포이고, 다른 한 번은 12월 29일 오전에 벌어진 전남 무안 항공기 사고입니다. 두 사건 모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면 안 될,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비상계엄 문제는 접어두겠습니다. 항공기 대형 참사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중복되었습니다.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번 참사에 연루된 사람들의 구구절절 사연은 우리의 말문을 막히게 합니다.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를 철저하게 해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자고 말은 할 수 있으나, 그런 방식으로 여기에 얽힌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겪은 지 10년 만에 다시 발생한 이런 끔찍한 대형참사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을 겁니다. 그 트라우마의 깊이를 누가 다 계산해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당한 유대인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도 그런 질곡의 역사를 거쳐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인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해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속사정의 깊이가 성육신이라는 신학 개념에 들어 있습니다.
사르크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에서 육신은 그리스어 사르크스(σὰρξ)의 번역입니다. 단백질로 된 살덩어리가 바로 사르크스입니다. 이 육체는 수준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영지주의에서 그렇습니다. 중세기 기독교에서도 육체는 폄하되었습니다. 그런 전통이 청교도 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살덩어리로서의 인간 육체는 동물의 육체와 똑같습니다. 먹어야 하고 번식해야 합니다. 그것은 본능이라서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본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창조 신앙 안에서 본다면 그런 육체의 본능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식욕이 없다면 건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성욕이 없다면 후손을 이어가기 힘듭니다. 문제는 그런 본능이 적절하게 제어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끄럽고 추한 모습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남보다 더 맛나고 비싼 음식을 먹으려고 다툽니다. 성을 상품처럼 다루는 성매매와 포르노 산업도 상당합니다. 어쨌든지 이런 육체적 본능이 예수께 있다고 상상하기는 찜찜합니다. 가능한 한 예수를 순전히 영적인 존재처럼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분명히 로고스이신 예수께서 사르크스의 지배를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영지주의가 들어설 틈이 없는 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께서 단순히 육신의 한계를 안고 살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체로 살았던 예수님이 바로 창조와 세계 작동의 근본이라는 사실이 더 근본적인 메시지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고, 부활하신 분이시며,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시고, 마지막 때 생명의 심판자로 다시 오실 재림주라고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우리와 똑같은 육체로 살았던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인가요? 그가 어떻게 초월적인 하나님과 동격이라는 말인가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정신 나간 말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그러려니 하고 믿을 뿐이지 그 믿음의 근거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믿음이 깊어질 수 없겠지요.
사실은 저도 그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맺고 끊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성육신의 신비’라고 붙였습니다. 성육신만이 아니라 삼위일체도 신비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구원도 신비이고 교회도 신비이며 믿음도 신비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더 착하거나 똑똑해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컴퓨터 계산기로 설명할 수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신비라는 말은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 않은 심연이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 심연을 생명의 깊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 깊이를 부정합니다. 자기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나사렛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동네 친구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 고정된 시각에 묶여 있으니까 예수께서 고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사람의 고정관념이 어떤 실체를 경험하는 데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과 거꾸로 그런 선입견을 내려놓고 열린 눈으로 어떤 대상을 대할 때 새로운 깊이가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일상 자체가 신비롭기 때문입니다. 그 신비를 우리는 다 놓치고 사는 겁니다. 저는 요즘 부엌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아주 특별한 현상을 경험합니다. 남쪽 통창으로 햇살이 깊이 들어옵니다. 겨울철에는 햇살을 더 정감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밖으로는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대나무 잎에 햇살이 반사되어서 분수처럼 퍼집니다. 아내에게 ‘저거 봐라, 멋지고 신비롭지 않나?’ 하고 말합니다. 물론 저보다 더 깊고 강렬하게 일상의 심연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거고요. 일상도 이러니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2, 3년 유랑생활을 함께한 예수님에게서 아주 특별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생명의 심연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만 경험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선고한 유대 산헤드린 의원들이나 십자가 처형을 선고한 빌라도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 모두는 부활의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만 일어났던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자들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겠지요. 제자들도 처음에는 자신들 앞에 나타난 예수를 헛것처럼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구약성경이 어렴풋이 예견했던 종말 생명의 선취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일종의 견성(見性)이기도 하고, 돈오(頓悟)이기도 합니다. 그런 종교적 경험은 숫자로 표기되거나 실험실에서 재현되는 게 아닙니다. 깨달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의 세계이자 깊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독생자의 영광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특별한, 그래서 유일무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경험은 오늘 본문 14절이 말하듯이 예수님에게 드러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께는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특별한 영광이, 즉 존엄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도 일상적인 게 아니라서 실감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예배 자리에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가 앉아있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소설가의 아우라를 느낄 겁니다. 그런 아우라는 소설가로서 최고 권위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특별한 종교적 아우라를 예수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따라가고 그런 고백을 드리고 싶지요? 이미 그런 믿음 가운데서 살아가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 경험이 없거나 부족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똑같이 부엌에 앉아서 점심밥을 먹으면서도 대나무 숲에서 분수처럼 솟아나는 햇살을 느끼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교회 생활을 취미가 아니라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궁극적인 운명에 관계된다고 여긴다면 앞으로라도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특별한 경험 안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해야겠지요.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운명에 나타난 것이니까요.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곧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드러나심입니다. 그 하나님은 생명 창조자이십니다. 절대 사랑이시기도 합니다. 평화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생명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은 곧 우리에게 평화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은, 즉 생명 충만을 경험한 사람은 평화를 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 바로 그런 하나님의 영광이 실현되었기에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한 겁니다.
본문은 독생자의 영광과 더불어 예수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즉 생명 충만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선물로 받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야말로 우리 인생이 풍성해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 1:17절은 이를 율법과 연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말 그대로 논리와 합리성에 기초한 법입니다. 율법주의가 곧 법치입니다. 법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만 사회가 건강하게 굴러갑니다. 문명국가에서 최선은 법치입니다. 그러나 법이 현실에서 얼마나 자주 왜곡되는지를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법이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법의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최선으로 법이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를 만들어갈 뿐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모세의 율법과 질적으로 다른 사건입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게 아니라 받은 선물이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손해를 봐도 전혀 손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 하나만으로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삶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특히 재산과 권력과 명예와 스펙 등으로 사람이 평가되는 21세기 이 물신숭배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겠지요. 끊임없이 모세의 율법에, 세상의 규칙과 범주에 충실하고 거기에 만족하라는 요구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인정받을 수 있고, 그렇게 인정받아야만 세상살이가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인격적인 사람이라는,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육신의 신비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일이 얼마나 시시한지를 압니다. 2025년에 신성과 인성이 하나를 이룬, 역사 초월과 내재가 하나를 이룬 성육신의 신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은혜와 진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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