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4주, 2024년 12월 22일
미가 선지자의 신탁
미가 선지자는 기원전 750-690년에 살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2천 7백 년 전 이야기입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먼저 기원전 721년에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죽고, 노예가 되었으며,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훗날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기원전 587년에,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 140년쯤 지나서 망했습니다. 그사이에 수많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통치를 당하게 된 이유를 다 알지 못하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분단된 상태로 지내는 이유를 다 알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물론 학자들이 겉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몇몇 이유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역사에서 발생한 어떤 사건을 완벽하게 해명하지는 못합니다. 오죽했으면 <팡세>를 쓴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인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말했겠습니까. 역사에서 아주 사소한 사건이 ‘나비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들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멸망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치 지도자들이 인간 삶의 근본보다는 정치적인 계산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순전히 정략적으로 행동하다가 국내외 정책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범하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은 외교 동맹 관계만 믿고 무모하게 아시리아와 전쟁을 벌였다가 망했습니다. 남유다의 멸망에 관해서는 예레미야 덕분으로 조금 더 소상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신흥제국 바벨론도 팽창정책을 썼습니다. 주변의 작은 나라는 바벨론에 저항하든지 원만한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원만한 외교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바벨론의 속국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주민의 생존이 중요하니까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서 일단 바벨론과 화친을 맺자고 주장했습니다. 일종의 주화파입니다. 하나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니까 걱정하지 말고 바벨론과 전쟁을 벌이자고 외쳤습니다. 일종의 주전파입니다. 왕실 내부의 의견도 분분했습니다. 결국에는 주전파가 승리했습니다. 결과는 파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다윗 궁은 불탔으며, 값진 물품은 모두 탈취당하여 수레에 실려서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미가 시대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근본적인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위급 상황을 대처할 인식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욕망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왕이나 대통령도 작은 일에 휘둘리는 소시민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정치는 알아도 문학과 역사와 철학, 그리고 자연과학에 관한 기본 소양이 턱없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종종 자기 연민과 두려움에 휩싸이고 미움과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모든 한계를 그대로 안고 있으니까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기 어렵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도 그런 한계로 나라를 수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런 역사적 사실과 인간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 근거하여, 그리고 선지자 전통에 따라서 미래의 통치자에 대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5:2절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의 신탁(神託, oracle)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베들레헴 출신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이나 여리고나 사마리아처럼 역사가 깊은 큰 도시가 아니라 남쪽 오지에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 촌동네가 나라를 다스릴, 그러니까 나라를 구원할 자의 출생지가 되리라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미가는 베들레헴이라는 지역만이 아니라 ‘상고’와 ‘영원’을 거론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해하기 좋게 번역했습니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래의 통치자는 다윗 가문이 베들레헴에 자리 잡기 훨씬 이전으로 소급된다는 뜻입니다. 당시에도 다윗 후손에게서 메시아가 온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었습니다. 미가가 받은 신탁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의 뿌리는 다윗 왕조에 제한받지 않고 아득한 옛날로,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역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아득한 옛날과 태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모든 것 역시 다 그렇습니다. 제가 지난 12월19일 밤 11시쯤 잠자리에 들려고 불을 끄고 침대에 걸터앉아서 취침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 동창을 통해서 들어온 달빛이 방안 깊숙이 들어와 침대까지 비추었습니다. 다시 일어나 창문을 통해서 밤하늘과 마당과 눈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내다보았습니다. 너울거리는 달빛으로 가득한 시골 풍경을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달빛은 태양에서 나온 빛이 달에 반사된 물리 현상입니다. 그 태양은 45억 년 전에 생긴 별입니다. 제가 본 그 빛은 바로 아득한 옛날이고 태초입니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선 땅은 또 어떻습니까. 함께 예배드리는 교우들은 또 어떻습니까. 2천 년 이어진 찬송가와 성경과 우리의 예배는 또 어떻습니까. 예배당 안에서 울리는 찬송 소리와 성경 읽기와 설교 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아득한 옛날과 태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가와 예레미야와 마태
미가 선지자의 신탁은 1백 년 후에 예레미야에게서(렘 26:17-18) 인용되었고, 다시 6백 년이 흐른 뒤에 마태복음에서 인용되었습니다. 동방에서 오랜 여행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점성술사 세 사람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헤롯왕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소집하여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미가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 2:5-6절입니다.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베들레헴에서 출생했고 나중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라는(요 1:46) 말을 듣던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님을 미가 선지자가 미래의 통치자로, 즉 메시아로 선포한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한 것일까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한 것을 왜 질문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만약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삼위일체 관점에서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시며, 미가 선지자가 선포한 미래의 통치자가 분명하다면 왜 아직 세상에 구원이 실현되지 않은 것일까요? 예수께서 굳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로마 제국을 밀어내고 가난한 자를 부자가 되게 하며 병든 자를 모두 고치고 죽은 자를 다 살려내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세상은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불행한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합니다. 뻔뻔한 사람들은 여전히 뻔뻔합니다. 인면수심이라고 부를만한 일들이 여전히 일어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오셨는데도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를 메시아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미가 선지자는 5:4절에서 미래의 통치자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해서 통치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호와의 능력과 위엄은 세상의 능력이나 위엄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의 능력과 위업은 왕이나 대통령, 또는 세계적인 기업가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자연과학과 기술과 돈이야말로 삶의 능력이고 위엄일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있어야만 세상을 지배하고, 자기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삿 9:8-15절에는 요담 우화가 나옵니다. 사사 기드온에게는 칠십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세겜에 사는 첩을 통해서도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을 두었습니다. 기드온이 죽자 아비멜렉은 평소에 첩의 아들이라는 놀림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배다른 형제 칠십 명을 때려죽입니다. 막내 요담만 간신히 몸을 숨겼습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됩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에게 우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무들이 감람나무에게 가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으나 감람나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모두 왕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거절합니다. 마지막 가시나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수락합니다.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얼마 후에 아비멜렉은 전쟁에 나섰다가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떨어뜨린 맷돌에 머리가 으깨져서 죽습니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그 권한을 행사하는 데 매력을 느낍니다. 요담 우화에 표현되었듯이 ‘우쭐대려는 것’입니다. 어릴 때 골목대장이 보이던 모습과 다를 게 없습니다. 자기가 우쭐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대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도 지도자가 없으면 이 세계는 무정부 상태로 떨어지니까 사람을 뽑아서 나라 경영을 맡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이런 현실 정치에서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정치 지도자에게 너무 큰 기대를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메시아가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건 망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차선책으로 가능한 한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면서 따뜻한 마음이 있는 지도자를 분별하여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시행착오는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미국이나 프랑스나 캐나다나 이스라엘 등등, 다른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도 이런 시행착오는 늘 거듭되었습니다. 한 인간이 풀어갈 수 없을 정도로 이 세계가 복잡하며,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예민하게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왕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정치 지도자들이 말하는 그런 능력과 위엄과 질적으로 다른 능력과 위엄이 예수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막 1:22절에 따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다고 합니다. 말과 성경 지식과 유대교 교리에만 매달리는 서기관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바리새인처럼 도덕 군자연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종교적 권위에 매달리는 게 아닙니다. 요담 우화에 나오는 가시나무처럼 사람들을 위협하고 우쭐대면서 군림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요행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대통령 놀이에 심취하거나 아첨하는 말을 즐거워하는 게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삶입니다. 생명의 본질에 천착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은 그런 이들을 불편하게 여기고 거추장스럽게 여깁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소란을 피우는 예수를 좋게 볼 제사장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예수를 호의적으로 생각할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 황제를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라고 외친 예수를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을 로마 정치인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편들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멀리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게 당시의 기존 질서에 저항하면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던 예수께서는 일종의 마녀사냥이라 할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런 그를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과 오늘 우리는 미가 선지자의 신탁에 예고된 미래의 통치자, 즉 메시아라고 믿습니다.
이게 과연 설득력이 있는 믿음인가요?
미가는 5:5a에서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라고 선포했습니다. 미가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도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사 9:6)라고 선포했습니다. 평강은 히브리어 샬롬의 번역입니다. 샬롬은 정치 지도자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탄 사람이 최고 지도자가 되어도 완전한 평화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요 14:27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출생 전승에서 목자들이 들은 천사들의 합창 소리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아기 예수가 평화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미가 선지자와 이사야 선지자가 신탁으로 선포한 평화의 왕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땅끝까지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신앙 전통에서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당시의 로마 제국에서는 ‘로마의 평화’가 지배 이데올로기였고, 오늘 21세기는 자본과 물질이 지배 이데올로기입니다. 부자로 살아야 평화로운 인생이 보장된다는 달콤한 유혹이자 거부하기 힘든 위협입니다. 이런 시대에도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여러분의 삶에서 정치와 경제로 인해서 영향받는 부분을 가능한 한 줄여나가십시오. 그리고 정치와 경제 논리가 침범하지 못하는 삶의 영역을 넓혀보십시오. 세상 문제에 일절 관심을 끄고 출가 수도승처럼 살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세상 통치자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로 충만해지는 게 최우선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은혜가 대림절 넷째 주일을 맞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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