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기쁨의 근원 (느 8:1-3, 5-6, 8-10)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1. 29. 07:07

주현절 후 3, 2025년 1월 26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패전한 나라와 그 백성들의 운명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백성 모두가 폐족이 되었습니다. 불타고 죽고 강탈당하고 성폭행당하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지도급 인사들과 장인들을 비롯한 상당수 사람이 바벨론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위풍당당하던 바벨론 제국은 얼마 후에 페르시아에 의해서 패망했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포로로 잡혀 온 소수 민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 정책에 따라서 유대인들도 기원전 530년경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 몇 차에 걸쳐서 귀환이 이어졌습니다. 그들 중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있습니다. 에스라는 모세 오경 연구에 탁월한 학자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에게서 유대의 총독이라는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의 주요 책무는 예루살렘 성벽 수축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율법 학자로서, 그리고 느헤미야는 정치인으로서 유대의 회복을 위해서 절치부심 노력했습니다.

 

모세 오경 군중 집회

 

오늘 설교 본문인 느 8:1절 이하에는 당시에 열렸던 한 특별한 군중 집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백성들이 학사(서기관)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오기를 청했습니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 책을 어딘가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에스라는 일곱째 달 초하루, 우리로 말하자면 설날 새벽부터 정오까지 모세 오경을 사람들 앞에서 읽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2절과 3절에 반복됩니다. 아이들을 빼고 모든 사람이 모였다는 뜻입니다. 8절이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

 

많은 사람이 모인 그 자리에서 에스라가 모세 오경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해주니까 백성들이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과정이 세 단계로 나눠집니다. 첫째는 낭독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예배를 드릴 때 대표자가 세계 교회력의 성서일과(lectionary)에 따라서 성경 구절을 낭독합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세계의 모든 교회는 시편을 포함해서 네 군데의 성경 본문을 읽습니다. 구약, 시편, 신약의 서신, 신약의 복음서입니다. 목사가 설교하기 전에 성경 본문 자체를 읽고 듣는 전통은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정확하면서도 알아듣기 좋은 우리말 성경 번역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해석입니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성경 본문에 관한 해석입니다. 성경 본문은 은유와 상징과 비유가 많기에 정확하게 해석하지 않으면 오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라는 문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주 공간에 계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먹혔습니다만 오늘날 천문학과 우주 물리학에 관해서 약간의 상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라는 문장을 보십시오. 엄마가 딸의 이름을 부르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성대가 있어서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사람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어떤 절대적인 존재와의 관계를 전하려는 문학적 메타포입니다. 바르게 해석할 때만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24백여 년 전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에스라 서기관이 모세 오경을 해석했다고 하는데,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축자 영감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만큼 성경을 보는 눈이 흐리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깨달음입니다. NIV 성경은 the people could understand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백성들이 에스라의 오경 해석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그 말씀과 하나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외국어로 된 책을 이해하려면 외국어를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히브리어 성경은,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헬라어 성경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외국어를 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이해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앞에서 성경은 은유와 상징이 많기에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해도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어떤 시간과 공간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분의 통치를 가리킨다는 문장에서 어려운 단어는 없으나 그 문장이 가리키는 차원은 아주 심층적이라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해 문제

 

이해’(understanding) 문제는 하나님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중요합니다. 어떤 사안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면 대화가 안 됩니다. 작년 123일에 벌어진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그 이후 벌어진 대통령 탄핵과 내란죄 우두머리 피의자 체포와 헌재 공판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반국가 세력과 종북 세력을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대 야당의 횡포와 선거 부정 의혹이 계엄 선포의 근거라는 주장도 내놓았습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대통령은 자기 뜻대로 나라가 운영되지 않을 때 군대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헌법상의 계엄 선포 요건은 헌법 77조에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라고 나옵니다. 계엄 선포 당시 우리나라가 군병력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혼란 상태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또 이런 주장도 했습니다. 실제로 계엄을 실행하려는 게 아니라 국민에게 나라의 혼란 상황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본인은 현명한 왕이고 국민은 사리판단 못 하는 어리석은 대중이라고 여기나 봅니다. 자신을 절대군주로 여기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발상입니다. 그는 극우 유튜버 확신범처럼 앞으로도 헌재 공판 과정에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세상과 정치를 그렇게 이해하기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작년 10 27일 서울 한복판에서 열렸던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오버랩되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기 위한 대규모 집회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동성애가 핵심입니다. 지난여름 사실혼 관계에 있던 동성애 파트너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대법원판결이 나온 뒤에 결국에는 동성혼 합법화가 일어날 것을 걱정한 조치입니다. 한국교회가 모든 힘을 여기에 쏟아붓는 이유는 성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에게 이성애자들과 똑같은 권리를 주는 것이야말로 나라와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는 가장 큰 범죄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계는 동성애자들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태국을 비롯한 전 세계 37개국이 동성혼 합법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정치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이나 동성애 문제가 교회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200만 연합예배라는 힘으로 윽박지르는 한국교회나 비슷합니다. 세상과 인간과 역사와 삶에 대한 이해가 한편으로는 너무 단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가볍거나 천박하기에 벌어진 사단(事端)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회심

 

오늘 본문 느 8:9절에 따르면 율법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다 울었다.’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이 해석되고 이해되면 사람들은 자기를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자기를 성찰하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당연히 울게 됩니다. 여기서 울음은 실제의 생리적인 눈물 현상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한계를 분명하게 인정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지금 에스라가 모세 오경 중에서 어떤 부분을 읽었는지는 모릅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읽었다고 하니까 전체를 읽지는 못했겠지요. 50장에 이르는 창세기만은 다 읽을만한 시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인간이 어떻게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고 쫓겨났는지 등등의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그들은 영혼이 흔들리는 어떤 경험을 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가나안 문명에 푹 빠져서 살다가 결국에는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자신들의 운명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귀신에 홀린 듯이 헛것에 영혼을 맡기고 살았던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았습니다. 삶의 근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은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서 소위 탕자의 비유를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비유라고 하는 게 정확하긴 합니다. 둘째 아들은 유산을 미리 상속받아서 아버지 계신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 신세로 돼지 농장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고향 집으로 돌아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형의 눈치도 봐야 합니다. 고민의 밤을 새웠겠지요.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제야 그의 영혼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둘째 아들의 심정이 바로 에스라의 설교를 듣던 예루살렘 사람들의 심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자유로워졌고, 부끄러움도 넘어서서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영혼의 자유를 느낀 순간이 얼마나 됩니까?

 

여호와로 인한 기쁨

 

아주 고조된 분위기에서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0절을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회개하고 자복하면서 울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백성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이날은 주의 성일이라고 짚었습니다. 앞에서 일곱째 달 초하루가 우리 명절인 설날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한 절기이니 축제를 열어야 합니다.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과 나눠서 먹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영혼의 떨림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축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삶의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본 사람은 삶의 환희를 느낍니다. 죽음을 가깝게 느낀 사람은 일상에 깃든 생명의 충만감도 느낍니다. 눈물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은 축제의 깊이도 모릅니다. 겉으로 떠들썩하게 살아도 내면은 공허하니까요.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라는 말은 기쁨의 근원이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이를 신약의 관점으로 바꾸면 기쁨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됩니다. 이게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파트너를 만나서 결혼하면 기쁩니다. 실직자로 지내다가 직업을 얻으면 기쁩니다. 부부 사이가 나쁘다가 따뜻해지면 기쁩니다. 병으로 고생하다가 치료되면 기쁩니다. 이런 기쁜 일을 우리는 찾아다닙니다. 그런 기쁜 일이 여러분에게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다음의 사실을 여러분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기쁜 일만이 아니라 슬프고 어려운 일도 반드시 일어납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녀도,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충성해도 어려운 일을 겪습니다. 앞으로 생성형 인공지능이 임신부터 죽음까지 완벽한 설계도를 그려주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줄지 모릅니다. 완벽한 자율 주행 자동차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기쁜 일만 일어날까요?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이런 세상은 실제로 불가능하고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세계 최고 기술인 바둑 인공지능 두 개가 있다고 합시다. 두 인공지능으로 시합하면 둘 중의 하나는 집니다. 우리 인생에는 언짢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기에 기쁜 일만 따라다니다가는 실망하게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그렇게 살다가 바벨론 포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어도 여전히 불행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면, 교회에 다니나 다니지 않거나 인생살이에서 별 차이가 없다면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두 단계로 생각해야 합니다. 첫 단계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권력이나 돈이 제공할 수 없는 삶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 깊이가 무엇인지는 여러분도 잘 알 겁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숨쉬기와 먹기와 배설하기와 걷기입니다. 큰 수술을 경험해보신 분들을 알겠지만 먹고 배설하고 걷는다는 건 정말 황홀한 생명 경험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일상에서 이런 일들이 너무 당연해서, 그리고 자극적인 데에 익숙해서, 별로 기쁨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둘째 단계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위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자기 노력으로 자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런 압박감과 두려움이 우리를 존재론적 기쁨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21세기 현대인들이 상당히 고급스러운 수준으로 잘살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불안증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옆에서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성질이 폭발하는 이유가 바로 압박감과 두려움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데도 압박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한둘이 아닙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겠으나 믿음의 실체는 없는 겁니다. 평소에 예수와 그의 말씀을 얼마나 생각하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부활 생명을 약속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크고 기다려지는 기쁨은 없습니다. 기쁨의 궁극적인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까, 걱정하지 말고 그분에게 실제로 가까이 가보십시오. 일상에서 연인이나 손자 등등,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갈 때도 우리는 상당한 정도의 기쁨을 경험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그 기쁨이, 그 평화와 자유가 얼마나 풍성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