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생명의 그루터기 (사 6:9-13)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2. 18. 06:19

주현절 후 5, 2025년 2월 9

 

 

이사야가 활동하던 기원전 736-701년은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이스라엘이 2백 년 정도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나라인데 분단되었으니, 그들의 어려움이 얼마나 심각했을지 불문가지입니다. 더구나 당시는 앗수르 제국이 지금 트럼프의 미국처럼 팽창 정책을 펼치던 시기였습니다.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맞서 2년간 싸우다가 기원전 721년에 패망했습니다. 남유다는 기원전 701년에 앗수르에 항복했습니다. 조공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한 겁니다. 왕조만 유지될 뿐이지 한 국가로서의 떳떳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앗수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유다를 귀찮게 할 것이고, 남유다는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가 캄캄한 상황입니다. 이런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이사야 선지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헛된 예배

 

선지자들은 인간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랬습니다. 그가 볼 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망한 이유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1장에서 반복해서 그 사실을 피력합니다. 2절에서 이사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1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3절의 표현은 노골적입니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제사를 열심히 드릴 뿐이지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쳐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17절은 이렇게 외칩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는 겉으로 화려한 예배와 헌금보다는 고아와 과부 같은 어려운 이들을 멸시하지 말고 돌보는 삶을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21세기 한국교회와 한국 정치계를 향한 외침이라고 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설교를 듣고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크게 깨닫고 회개하여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았을까요? 영혼의 떨림을 경험하고 뭔가 변화된 사람도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크게 변화하지 않았을 겁니다.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부동산 투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게 삶의 방식으로 고착되었기에 계속 거기에 매달려서 삽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그런 행태를 탓하기도 힘듭니다. 요즘은 거룩한 직업이라 할 의사 업무도 많은 경우에 돈벌이로 전락했습니다. 종합병원에서 페이 닥터로 일하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월말에 전체 회의를 열면서 과별로 수익계산 통계표를 돌린다고 합니다. 수익을 많이 올린 과 의사는 인정받고 못 올린 의사는 지적당합니다. 수익을 많이 올리려면 환자에게 비싼 검사를 가능한 한 많이 받게 해야 합니다. 국회의원들이 실제로 나라를 위해서 일하겠다면 교사 수준의 연봉으로 만족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오늘의 시대정신이 이렇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내팽개치는 삶의 방식과 세상 작동 방식이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할 정도로 삶의 질이 바닥을 쳤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사야 선지자는 6:9-10절에서 문학적인 수사를 발휘해서 묘사했습니다.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라고 말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아서 하나님께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걱정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으라는 역설적 표현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이 선지자의 설교를 듣고 돌아오도록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고, 그들이 돌아오면 기꺼이 축복해 주셔야 하는 거니까요. 이사야는 11절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또는 자문이기도 합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의 간절한 마음이 묻어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실망스럽습니다. 성읍이 황폐하고 사람도 없고 토지도 황폐하게 될 때까지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먼 곳으로 이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남은 십분의 일도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 어디에서도 희망의 끈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사야도 유대와 예루살렘에 미련을 두지 말고 이제는 다른 데서 살길을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 순간에 이사야는 전혀 다른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13절입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루터기는 볼품이 없습니다. 그걸 보고 다시 나무가 살아나겠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루터기가 완전히 죽지만 않았다면 거기서 잎과 가지가 새롭게 올라옵니다. 저는 12년 전에 귀촌해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중에 과일나무도 있었습니다. 살충제를 뿌리지 않으니까 벌레들 등쌀에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오래 참고 돌보다가 작년에 모두 베어버렸습니다. 뿌리까지 캐낸 나무도 있고, 그루터기로 남은 것도 있습니다. 그루터기에서 가지가 봄부터 가을까지 끊임없이 나오더군요. 이사야는 그루터기를 거룩한 씨라고 바꿔 불렀습니다. 씨도 겉으로는 볼품이 없으나 땅에 심겨 물과 햇살을 받으면 상전벽해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우리의 시대

 

여러분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풍요롭습니까, 이사야 시대처럼 황폐합니까? 풍요로운 부분도 있겠지요. 이 세상은 살만하다고 여길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작년에는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도 나왔고, 그 이전에 한류 문화가 동남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제가 잠시 독일에 유학하고 있던 1983-1985년도만 하더라도 독일 사람들이 당시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서 뛰던 차범근은 알아도 싸우쓰코리아는 잘 몰랐습니다. 지금은 개인 소득 수준도 세계 10위권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으로 삶이 풍요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교회도 그렇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대부분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세계 선교 역사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이런 외형적 모습만으로 풍요롭다거나 은혜롭다거나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내면에서는 빈곤합니다. 황폐합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위 태극기 부대로 일컬어지는 극우 집회에 동원되는 사람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입니다. 그 대표자가 전 아무개 목사라고 합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말이 아니라 극우 선동가의 말입니다. 작년 1027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가 서울 광화문, 시청, 서울역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주도한 인물은 태극기 부대와 비슷한 세이브 코리아 조직에서 활동하는 부산 세계로교회 손 아무개 목사입니다. <1027> 집회는 차별금지법 반대를 기치로 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동성애 반대가 핵심이었습니다. 동성애에 관해서는 개인적으로 시시비비가 가능합니다만, 이렇게 한국교회의 모든 동력을 다 동원하다시피 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교회의 폭력성을 보여줍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대상을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영혼이 황폐할 때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선지자의 시각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덩그러니 그루터기만 남은 셈입니다.

 

저는 이사야가 표현한 그루터기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개인 실존의 궁극적인 미래를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젊은 사람들은 가지와 잎과 열매가 무성하겠지요. 종일 일하거나 밤새워 책을 읽어도 피곤한 줄 모를 거고요. 그런 젊은이들을 옆에서 보면 늙은 우리도 생기가 도는 듯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얼마 가지 못해서 늙은이나 젊은이나 별 큰 차이 없이 그루터기만 남게 됩니다. 죽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치열하게 살아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직할 필요도 없고 정의로울 필요도 없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라는 영국 생물학자가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에 갇혀 안하무인의 태도로 쓴 책 <이기적 유전자>의 주장을 충실히 따르면 그만입니다. 유전자 결정론을 주창하는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히틀러도 잘못이 없습니다. 유전자가 그렇게 시킨 거니까요. 대한민국에서 뜬금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대통령의 행위도 유전자의 책임이라는 말이 되니까요. 인간이 유전자의 기계적 작동의 포로에 불과하다면 삶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거지요.

 

오늘 이사야는 바로 세상이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우리가 죽기 직전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신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입니다. 죽은 듯이 보이나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합니다. 그냥 씨가 아니라 거룩한 씨가 그런 생명의 토대입니다. 거룩한 씨는 죽은 씨가 아니라 살아있는 씨입니다. 그런 씨는 반드시 숫자가 많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적어도 됩니다. 다만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결속된 이들은 죽음 이후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희망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이런 믿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형제와 자식들이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 중요한데, 건강하고 연봉이 충분하고 인격적으로 살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사야의 믿음과 희망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6:9)

 

내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이사야와 같은 영적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 대목인 사 6:1 이하에 나오는 이사야의 소명 경험을 봐야 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이상한 환상을 봅니다. 천사의 일종인 스랍들이 보좌에 앉으신 주를 노래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존재와 생명의 신비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 앞에서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뚫어봤으니까요. 스랍 중의 하나가 제단의 숯불을 이사야의 입에 댑니다.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

 

내가 여기 있다.’라는 문장은 히브리어 발음으로 힌니의 번역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Here am I.’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문장이 이번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저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이전에는 이사야가 소명을 감당한 준비가 되었다는 정도로만 이해했었거든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 그리고 자신의 죄 용서를 경험한 이사야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내적 평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루터기와 같은 상황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루터기처럼 초라한 인생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벗어난 겁니다. 이 문장은 나는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도 나를 기다리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분은 창조주이시기에 이사야는 안심하고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매우 늦게 영적으로 철이 든 것 같습니다. 일흔 살이 넘어서야 이사야의 저런 삶의 태도를 실감하게 되었으니까요. 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저는 다 알지 못하지만, 그 모든 미래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기에 근심과 걱정을 완전히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당한 정도로 떨쳐내었습니다. 저의 인생살이에 하나님의 눈높이에 한참 떨어지는 대목이 있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저입니다. “힌니- Here am I.” 마지막 심판 자리에서도 현재 저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서게 될 겁니다. 나에게서 벌어지는 부끄러움까지 그냥 안고 설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죽음까지 넘어서는 완전한 내적 평화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교회력 성서일과(lectionary)에 따른 복음서 말씀에는 어부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다가 예수를 만나고 시몬 베드로가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5:8)라고 고백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후로 그 어부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은 거룩한 존재를 경험할 때만 나옵니다. 이는 곧 자기가 생명에서 무기력하다는 고백입니다. 생명의 출처가 국가나 자기 재산이나 자기 업적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뚫어본 사람은 자기를 잘 보이려고 과장하지 않고 자기 비하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한 존재 앞에서 자신의 인생이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자유를 얻습니다. 완전한 내적 평화 말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내적 평화를 누릴 때만 삶을 소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소명으로 산다는 말은 목사나 선교사나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하나님과의 결속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잘난척하지 않아도 되고, 부자로 살지 않아도 평화롭고 자유로우니까 여기 내가 있습니다.’라는 태도로, 즉 그분께 순종하는 태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소명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고 교회 역사에 나타났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런 소명 가운데서 어디에 있든지 생명의 그루터기로 살았습니다. 거룩한 씨로 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의 그루터기이며 거룩한 씨로 인정하고 받아주시기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