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후 7주, 2025년 2월 23일
부활 신앙
사도신경 후반부에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의미의 문장이 나옵니다. 그냥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몸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인 고전 15:35절 이하가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본문이 포함된 고전 15장은 신약성경에서 부활 주제를 신학적으로 가장 명확하게 해명하기에 부활 장이라고 불립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빈 무덤 전승보다 바울의 부활 이야기가 부활 신앙의 실체에 더 가깝습니다. 빈 무덤 전승에는 훗날 첨가된 전설적인 요소가 뒤섞여 있으나 바울의 부활 이야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도 바울 이야기가 훨씬 앞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따라가면 ‘몸의 부활’이 가리키는 신앙의 세계가 눈에 들어오겠지요.
고린도서를 기록한 바울은 본래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의 빈 무덤 이야기에 바울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 생전에 일면식도 없던 그가 어떻게 자칭 사도가 되었는지는 갈 1장에 나옵니다. 갈 1:13-14절에 따르면 그는 유대교에 충실하던 사람이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에 열광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개종한 겁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지도 않았고 전도 받지도 않았습니다. 독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받았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그의 회심에 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이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예수의 말을 듣고 완전히 돌아섰다는 거 아닙니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런 드라마가 바울 자신이 쓴 갈라디아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이 받은 계시 중심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바울에게서 부활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상대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고전 15:16-19절은 이렇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절대적인 주제인데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부활에 관해서 큰 관심이 없습니다. 설교자들도 부활에 관해서 설교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하고, 그를 믿는 우리도 부활한다고 말은 하지만, 부활의 내용에 대해서는 깊이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반 신자들의 부활 신앙은 전반적으로 빈약합니다. 이런 빈약한 부활 신앙으로는 자연과학과 문명이 고도화한 21세기 시대정신 앞에서 자신감을 잃습니다. 아니면 세상을 외면하는 고집불통이 됩니다.
부활 논쟁
바울은 고전 15:1절부터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오늘 본문에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고전 15:35) 당시에 부활 신앙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이 교회 안에서 충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지금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어도 세상 사람들보다 좀 더 착하게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또는 지금 여기서 먹고 살기도 바쁘기에 죽음 이후의 문제인 부활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더 근본에서는 35절이 말하듯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 신앙에 설득력이 없다고 여깁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서른 살에 죽고 아들이 아흔 살에 죽으면 부활의 세계에서 각자 죽을 때의 그런 모습으로 만나는 거냐, 잘생긴 사람은 잘생긴 모습으로, 못난 사람은 못난 모습으로 부활하냐,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바울은 36절에서 그런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고 일축합니다.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씨를 예로 듭니다. 씨는 죽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씨가 죽는다는 건 씨라는 형태의 해체입니다. 씨가 죽어서 싹을 틔운다는 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나 사람이 죽은 다음에 새로운 형태로 부활한다는 건 당장 일어나는 게 아니라서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논쟁하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 어떤 몸으로 변화하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런 물음에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구에 살았던 모든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리 가족과 친인척도 이미 죽기도 했고, 죽기 직전이기도 하고, 앞으로 모두 죽을 겁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어떤 상태로 있나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먼저 바울의 대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바울은 살전 4:13절 이하에서 죽음을 ‘잠’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합니다. 13-14절을 들어보십시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잠들면 거의 죽은 상태가 됩니다. 먹고 마시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사람이 앞에 와도 모릅니다. 불이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죽은 건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씨의 죽음을 사람의 잠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이 죽자마자 곧 싹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죽음과 싹 사이에 유격이 있습니다. 씨앗의 경우에는 그 유격이 짧아서 꽃과 열매까지 볼 수 있으나 사람은 아주 특별한 생명체라서 종말에 완성될 부활 생명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에서 단절된 순간인 잠이라는 상태를 우리는 견뎌야 합니다. 비유적으로 뇌사상태에 떨어진 거와 비슷합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죽음은 우리의 몸을 완전히 지구의 원소로 해체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위 구절에서 세상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자는 자들’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온다고 말합니다. 자는 자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입니다. 그게 바울이 말하는 부활입니다. 그런 부활이 실현되는 순간이 곧 예수께서 재림하는 때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이런 재림 신앙으로 모진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순교까지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잠에서 깨어나는 그 부활을 기다리면서 오늘의 일상을 버텨냅니다.
개인의 죽음과 보편적 부활 사이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우주의 종말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은 영원히 순환하고 회귀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습니다.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시작한 태초가 있듯이 세상과 생명이 완성되는 마지막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마지막은 전혀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씨앗의 시간에서 꽃의 시간으로 시간의 차원이 질적으로 달라지는 겁니다. 이런 태초와 종말이라는 성경의 시간 개념이 현대 물리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구체적으로는 빅뱅의 발견으로 인해서 그리스 철학이나 불교의 순환적 시간 개념보다 더 타당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다음입니다. 개인의 실존적인 죽음과 종말론적 보편적 부활 사이의 시간 간격이 너무 긴 게 아닐까요?
위르겐 몰트만의 유작이나 다름없는 책이 「나는 영생을 믿는다」입니다. 거기서 그는 죽음과 부활 문제를 물리학의 시간 개념에 근거해서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영생은 부활 생명에 대한 다른 용어입니다. 사도신경도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부활한 자의 생명이 곧 영생이니까요. 몰트만도 이전에는 바울의 가르침처럼 개별 인간이 죽으면 최후 종말까지 잠든 ‘중간 시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죽었고, 자기도 죽을 시점이 다가오면서 이 문제를 더 구체적이면서 더 실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대성 이론을 다루는 현대 물리학에서는 시간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속도가 다릅니다. 일반적인 계산으로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한순간일 수 있습니다. 이를 주제로 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빛 속도로 비행하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1년 다녀온 사람이 지구에 와서 보니까 5천 년이 흘렀다고 말입니다. 믿기 힘들지요? 이 세상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현상보다 훨씬 더 심층적이고 다원적입니다. 일상 경험이 허위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 감각에 들어오는 그것 말고도 여러 차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몰트만은 자기가 죽으면 잠에 떨어지겠지만 종말이 와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면 그 둘 사이에 놓였던 시간은 소멸하는 거나 마찬가지이기에 죽음 직후에 바로 영생한다고 말합니다. 몰트만의 관점에 일리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의 복잡한 현실에 부대끼느라 부활과 생명의 변형과 완성과 영생을 생각하며 살기 어렵다고, 그런 생각은 현실에서 너무 거리가 멀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중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멋지게 살아있는 우리의 형체는 씨앗과 같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호박씨나 해바라기씨를 머리에 그려보십시오. 비슷한 형체입니다. 지금 우리도 겉으로는 크게 달라 보여도 본질에서는 모두 엇비슷합니다. 흔한 표현으로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잘난척하고 싶고, 못났다고 자책감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조금 예쁜 씨나 못난 씨나, 겉에 상처가 있으나 없으나, 중요한 것은 싹을 틔울 능력입니다. 살아있어야 합니다. 대학교수로 살았든지 육체노동자로 살았든지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집에 살든지 작은 집에 살든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형체와 인간적인 업적은 곧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씨앗으로 사는 현재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간하고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씨앗의 모양을 가꾸는 게 아니라 씨앗의 생명을 보존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바쁜 중에 일상을 멈추고 예배드리면서 성경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몸과 신령한 몸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부활이 뭔지,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부활은 ‘자연적인 몸’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겁니다. 42-44절까지를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자연적인 몸(natural body)은 헬라어 σῶμα ψυχικόν의 번역이고, 신령한 몸(spiritual body)은 헬라어 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의 번역입니다.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몸이 ‘소마 프시키콘’이고, 미래에 얻게 될 몸이 ‘소마 프뉴마티콘’입니다. 이런 단어들이 오늘 우리에게는 낯섭니다. 조금 친숙한 표현으로 전자는 세속적인 삶이고, 후자는 영적인 삶입니다. 세속적인 삶은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사랑하다가 늙어서 죽는 운명의 삶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삽니다. 영적인 삶은 그런 세속적인 방식에 매몰당하지 않고 생명 충만하게 삽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야만 행복하나 다른 사람은 사랑이 많아야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변의 관심을 끌려고 하나 어떤 사람은 홀로 자유롭습니다.
자연적인 몸과 신령한 몸이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속적인 삶만 있는 게 아니라 영적인 것도 있고, 영적인 삶만 있는 게 아니라 세속적인 것도 있습니다. 두 요소가 섞겨 있고,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의 삶은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조금 더 관대하고 미래 지향적이며 평화롭게 살고 싶으나 종종 자기연민에서 묶입니다. 부활은 세속적인 몸과 신령한 몸이 완전하게 조화로운 상태로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천사는 여기서 메타포입니다. 썩지 않으며, 영광스러우면서 강력한 ‘소마 프뉴마티콘’이 되는 겁니다.
바울의 말이 정확하다는 증거가 있는가, 아무도 죽은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선택과 결단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와 종말 심판과 완성, 그리고 부활과 영생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하여 선택했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궁극적인 운명을 맡길 수 있는 대상을 찾아보십시오. 다른 데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광신적으로 믿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선 알고 믿어야겠지요. 그래서 부활 신앙이 무엇인지를 오늘 설명하는 겁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사도신경이 왜 그냥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했나, 하고 질문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도 ‘몸’이라는 뜻의 헬라어 ‘소마’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몸의 부활은 플라톤의 영혼 불멸 사상과 대립합니다. 영육 이원론에 근거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은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 영지주의를 낳았습니다. 영지주의에 기울어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육체성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썩을 육체를 지닌 분일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리스도교 인간론에서 영육 이원론은 자리가 없습니다. 육체가 없는 영혼만의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부활한 이후의 우리도 역시 영혼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생명인지는 아무도 묘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 생명을 신령한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사실은 신령한 몸이라 할 그 부활 생명이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에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꽃이 씨앗 안에 은폐되어 있듯이, 보물이 밭에 감춰 있듯이 말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를 느끼는 사람은 일상에서 이미 부활 생명의 기쁨을 누립니다. 일상에 은폐된 부활 생명을 알고 싶은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를 사랑하고 믿는다면 담대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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