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1주, 2025년 3월 9일
자기 의(義)
바울은 서기 56년 초에 그리스의 고린도에서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는 네로 황제(54-68년) 재위 초기입니다. 로마 제국이 꽤 번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서기 49년에 클라우디오 황제가 내린 유대인 추방 명령을 네로 황제는 즉위하면서 즉시 해제했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들 중에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의 튀르키예와 그리스 지역의 복음 선교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보고 이제 로마에 들렀다가 다시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로마에 가기 전에 먼저 복음의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담은 게 로마서입니다.
로마서 전체 16장 중에서 9-11장은 유대인, 즉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제로 한 내용입니다. 롬 9: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가 골육의 친척이라고 표현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롬 9:4)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것들은 종교적으로 소중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롬 10:1) 간절히 원했습니다. 롬 10:2절에 따르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열정은 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게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바울이 볼 때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다가 ‘하나님의 의’를 외면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자기 의는 곧 율법 신앙을 가리킵니다.
바울은(롬 10:5) 모세 오경에 속하는 레 18:5절을 인용합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이 율법 종교의 핵심 개념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면 의로워집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율법의 압축이라 할 십계명을 보십시오. 1)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율법은 열 개 조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수백수천 조항이 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헌법과 법률과 도덕 관습과 관행을 다 포괄합니다. 이런 법이 제대로 작동하면 세상은 정의로워지겠지요.
문제는 문자로서의 율법이 인간 삶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명제는 옳으나 우리 삶에서 거짓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도 있습니다. 여기 조폭들에게 쫓기는 한 여성이 있다고 합시다. 그 여성이 오른쪽 골목으로 도망치는 걸 어떤 사람이 보았습니다. 조폭이 이 사람에게 와서 지금 도망치던 여성이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고, 왼쪽 골목이라고 거짓으로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이긴 하나 필요한 거짓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마 5:21절 이하에서 율법의 불완전성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살인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도 역시 지옥 불에 들어갈 정도로 나쁜 행위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게 옳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도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께서 인간 행위에 관해서 말씀하신 엄격한 기준은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도 줘야 하고, 오른편 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편 뺨도(마 5:39) 내주라고 하셨으니까요. 일곱 번만 용서하지 말고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마 18:21-22)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이런 문제를 문자적으로만 생각하면 오해하는 겁니다. 이 현실에서는 아무도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서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삶에 머물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을 세우라는 가르침입니다. 율법 실증주의에 떨어지면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법망에만 걸리지 않으면 뻔뻔스러운 행동도 용납되고, 더 나아가서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바울이 3절에서 말하는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로움이라는 개념은 오늘 우리의 일상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인정받는 일에 신경 쓰면서 삽니다. 거기에만 완전히 몰두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데서 약간 거리를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라인 네트워크로 많은 사람과 연결된 21세기에는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게 됩니다. 자신의 미모와 건강과 수명과 삶의 재미를 다른 이와 비교하면서 만족해하거나 불안해합니다. 여러 방법으로 자기 인생에 더 완벽한 조건을 채워보려고 애씁니다. 그런 노력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부러움을 살 정도로 품위 있는 인생이 펼쳐져도 인간이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순간도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다른 이들에게 주목받는 일에만 신경을 쓰다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본질적인 대목은 놓칩니다. 바울은 그 중요한 대목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ῃ τοῦ Θεοῦ)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의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자기 의와 대립합니다. 자기 의는 자기가 중심이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능력이 중심입니다. 바울이 볼 때 사람이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히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본질에서 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에서 짚었듯이 그 어떤 것으로 채워도 생명 충만하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10:4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 즉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표(τέλος)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 문제를 비유적으로 ‘사물’(Das Ding)에 대한 하이데거의 설명에서 좀 더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에게 사물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사중자(四重者, Gevierte)의 신비로운 모임입니다. 사중자는 하늘과 땅과 신성한 것과 사멸할 자입니다. 여기 성찬용 포도주잔이 있다고 합시다. 포도주는 땅에 뿌리를 내린 포도나무가 하늘의 태양 빛과 물과 탄소를 받아들여 맺은 포도로 빚어집니다. 균의 작용인 포도의 발효가 일어나야 합니다. 포도주를 빚은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사멸할 자의 운명으로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포도주잔을 만듭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의 사유와 행위가 결합하는 그 과정에는 신비로운 신성이 함께합니다. 하이데거가 볼 때 모든 사물은 경이롭습니다. 요즘 우리집 식탁에는 접시에 담긴 멸치볶음이 나옵니다. 멸치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넣을 때마다 저는 멸치가 놀던 바다를 생각하고, 멸치를 건져 올린 어부를 생각하고, 멸치를 끓는 물에 삶아 유통한 모든 사람, 그리고 그것을 요리한 손길을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소소한 사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아는 사람은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의로움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길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믿음의 길을 제시합니다. 롬 10:9-1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9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주(Κύριος)라는 사실을 입(στόμα)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καρδίᾳ)으로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10절에도 입과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입과 마음은 같은 의미입니다. 자기의 전체 인격과 존재를 통해서 예수를 믿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바울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받아들여졌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의 회당에서 쫓겨나지 않았겠지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게 실제로 율법으로 나타나야만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예수 믿는 건 믿는 거고 어느 정도는 재력과 미모와 건강과 인격과 교양이 받쳐줘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지 말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면 좋겠지요. 사회적인 신분이 올라가고 다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건강하게 사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율법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율법에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날카롭게(radical) 뚫어본 것입니다. 그게 눈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전혀 못 보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걸 뚫어보기가 쉽진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 현대인들도 겉으로는 멋진지만 실제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일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잘난 사람은 더 잘나려고 애쓰고, 못난 사람은 자포자기합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 이후의 세계는 일방적인 국가주의가 퇴행적으로 작동합니다. 트럼프는 마피아 보스처럼 여기저기 돈을 뜯어내는 일에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합니다. 격투기 선수처럼 힘 자랑하고 잘난체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로마 제국처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이데올로기를 추구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집중하여 살라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안타깝게도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지 모릅니다.
믿음과 구원
예수께서 ‘주’이시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말은 세상에서 의롭지 못한 자로 배척받은 자를 창조의 능력이신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서 버림받을까, 하여 걱정하지 않습니다. 가난으로 인해서 인생이 망가질까 노심초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한 조건을 얻지 못할까, 하여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이 의롭지 않다고 배척한 이들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이 경건하지 않다고 판단한 사람들과 죄인들과 죽은 이들까지 의로운 이들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을 기다리고 희망합니다. 그들의 인간다움과 존엄성이 드러나는 세상이 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즉 신(神)마저 버린 자라고 조롱받았던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기에 자기 정당성에 집중했던 유대교와 로마 제국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현실성이 있을까요? 거리가 먼가요?
비유적으로 여기 왕이나 공주로 평생 살았던 사람이 있고, 농사꾼으로 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왕의 화려한 인생을 높이 평가하겠지요. 이 두 사람 모두 죽을 겁니다. 왕은 자기의 인생이 멋지고 즐거웠다고 노래하면서 죽고, 농사꾼은 고생했다고 한탄하면서 죽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모두가 절망합니다. 죽음이 거리가 멀다면 지난 시절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지난 시절에 온갖 즐거움을 만끽한 사람이 있고, 단조롭게 산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느끼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전도서 1:2절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2:1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역설적으로 인생살이에서 누릴 게 많았던 사람이 오히려 죽음의 순간에는 더 깊은 절망에 떨어집니다. 공부 기계처럼 노력해서 수능 만점 받은 학생과 놀며 지내다가 낙제 점수를 받은 학생이 똑같은 대학교에 입학하면 낙제 점수를 받은 학생은 대만족하고 만점 받은 학생은 실망하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낙제 점수 받은 학생의 심정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의로움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라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말씀을 실감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다수 사람이 율법적인 삶의 방식에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으나 중요한 것이기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율법은 사람을 그의 업적으로 평가합니다. 대한민국 사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대치 맘’이라는 유행어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 아이들이 훗날 사회에서 특별 대우를 받게 하려고 눈물겹게 헌신하는 젊은 엄마들을 빗대는 용어입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서울대학교와 의대에 들어가는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뺑뺑이 돌립니다.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돈이 완벽하게 지배하는 세상을 우리가 일상으로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율법 본질상 그런 방식으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위선자가 됩니다. 현대인들은 위선자라도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바보가 되고, 인생 낙오자가 된다고 여기니까요. 이게 우리의 현실이기는 한데, 이런 시대정신은 속임수가 아닐까요? 지금 우리는 속으면서도 속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닐까요? 어떻게 여기서 벗어나서 진짜 인생을 살 수 있나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구원받는 복음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을 본인이 대오각성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소소한 사물에서조차 존재의 경이로움을 느낀다는 하이데거의 설명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경이로움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는 주님이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라는 사실의 구원론적 경이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유와 평화를 얻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온갖 인간적인 계산서가 없어지고 껍데기는 물러갑니다. 세상의 유언비어와 음모론도 자리를 잃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도 자유로워집니다. 자기는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삽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바울과 종교 개혁자들이 말한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즉 생명과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업적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은혜(sola gratia)로 구원이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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