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하나님은 심판하시나?(눅 13:1-9)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4. 1. 08:12

 사순절 3, 2025년 3월 23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3:1절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로마 제국의 지방 장관 격인 총독 빌라도의 악행을 거론했습니다. 빌라도가 몇몇 갈릴리 사람들을 끔찍스럽게 죽이고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성전의 제물에 뿌린 사건입니다. 이런 사건은 주로 유월절 절기에 일어났습니다. 유월절에는 많은 순례자가 예루살렘에 집결합니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라서 유대인의 민족 감정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종종 사회 폭동으로 비화하곤 했습니다. 로마 총독은 평소 머물던 가이사랴에서 유월절 절기에는 치안 유지 차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본래 반골 기질이 강했습니다. 로마 군사들과 시비가 붙을 때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그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던 거 같습니다. 성경 외의 문헌에도 이런 참사가 나옵니다. 어떤 때는 수천 명이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도 예수께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왔을 때 발생했습니다.

 

불행과 죄의 관계

 

2절에서 예수께서는 갈릴리 사람들이 이렇게 참변을 당한 게 당신들보다 죄가 더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자기를 찾아온 이들의 주장을 배척했습니다. 죄가 많아서 이런 참변을 당했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다 죄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선천성 시각 장애인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께 누구의 죄로 저 사람이 저런 운명에 떨어졌냐고 질문한 데서( 9)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현대인의 논리로 바꾸면 가난은 게으른 탓이라거나, 스펙이 떨어지면 당연히 연봉도 적게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3절에서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제를 거론한 사람들이 듣기에 민망할 정도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어서 4-5절에는 또 하나의 참사가 거론됩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입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동남부에 있는 식수용 저수지입니다. 저수지를 지키려고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나 봅니다. 이런 일은 요즘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죄와 연결해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죄를 심판하신 거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죄는 양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50까지는 용서되고 그 이상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세 번까지는 용서받고 그 이상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의 불행 앞에서 자기가 조금 더 행복하다고 합리화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끊어서 말씀하신 겁니다. 3절의 문장과 똑같은 문장이 5절에도 나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라는 단어만 놓고 본다면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충고와 비슷합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불린 사람이나 졸지에 재산과 자식과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는 잿더미에 뒹굴면서 악성 피부병으로 곪아가는 자기 몸을 질그릇 조각으로 긁었습니다. 어머니 자궁에서 죽어서 태어나지 못한 운명을 부러워했습니다. 친구들이 그에게 와서 위로하고 권면하고 충고합니다.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결하고 확실한 믿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시험이니까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들의 권면이나 충고와 전혀 다릅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회개는 행위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것이라면, 예수께서 말하는 회개는 삶의 방향을 생명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전자가 행위의 변화라면 후자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존재가 변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도덕적이거나 덜 부도덕하다고 해서 망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존재의 변화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말씀이 회개하면 망하지 않는다는 뜻인지를 확인하는 게 더 좋겠습니다. 회개하면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느냐는 뜻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면 불행한 운명이 회개와 상관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행과 악행과 부조리의 이유를 충분하게 알지 못합니다. 파렴치하고 이기적이면서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서 인생을 끝낼 수도 있고, 정말 괜찮은 사람인데도 불행하게 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휴전 협정을 파기하면서까지 지난 318일 다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었습니다. 2백 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어린아이들의 운명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건 모른 채로 남겨둬야 합니다. 그걸 죄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하는 건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근본에서 부정하는 것입니다. 욥도 자기의 불행에 대한 원인을 모른다고 끝까지 버티면서 회개하라는 친구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욥기 결론에 해당하는 대목에서 그는 하나님을 지금까지는 귀로만 듣다가 이제는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나 여전히 비열하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면서 독선적인 21세기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종말론적 심판

 

이 대답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망한다.’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출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 선포한 메시지인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에 나옵니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그 하나님의 통치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나라, 그분의 통치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죄가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킬 정도로 폭력적이고 악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배신당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무기력해 보이지만, 종말에서는 하나님만이 승리자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종말론적 승리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종말론적 승리가 담보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종말론적 승리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 즉 메타노이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시간적인 의미에서 먼 미래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 종말은 이미 지금 여기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우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불행한 운명이 닥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동의하시나요? 문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하게 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옥황상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십니다. 벧전 3:19절과 4:6절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음부에 내려갔다고 합니다. 스스로 지옥까지 내려가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심판은 하나님의 창조 영성과도 대치됩니다. 창조 이야기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다.’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보기에 좋았던 세상을 하나님이 스스로 파괴하신다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놀랍기에 그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 바로 심판이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그의 사랑을 얼마나 느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을 절감한다면 그는 이미 여기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승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절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입니다. 죄는 자기 중심성, 즉 교만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게 무슨 사태인지를 잘 모릅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교회 생활을 잘하는 것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목사처럼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교만해질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일갈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덕스럽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중심에 놓고 있으니, 즉 자기 염려에 꽁꽁 묶여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런 데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런 점에서 죽어야만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는 말이 단순한 덕담이 아닙니다. C.S. 루이스가 죽기 전에 죽으라. 죽고 나면 기회가 없다.”(<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2 2)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주목받아야 행복감을 느끼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모든 조건이 갖춰져도 영혼의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 대통령이 되었다면 부끄럽고 고마운 마음과 순전히 섬기는 자세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어떤 대통령은 자기 생각대로 정국이 돌아가지 않으면 대화를 통해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다가 비상계엄까지 선포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는 방식으로 살면 어떤 조건에서도 불만스럽고 짜증스럽습니다. 온갖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삽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불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불행한 일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

 

조금 거칠게 말해서 우리가 없어도 세상이 돌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더 근본에서 사람이 없어도 지구가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소중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사랑 안에서만 제대로 빛을 내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삶의 중심으로 삼을 때만 우리는 충만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 삶의 조건이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는 돈도 제 것은 아닙니다. 저의 건강도 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늘 공짜로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하늘과 별과 달을 봅니다. 공짜로 나무를 만질 수 있고, 흙의 친구가 됩니다. 저는 평생 설교문을 작성했습니다.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올려놓은 설교문이 1100편입니다. 그 메뉴 공지에 내 설교문이 필요한 분은 얼마든지 가져가서 사용하시라고 썼습니다. 제 책의 내용도 나에게 허락받지 말고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지식재산권을 행사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본래 저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제 생명도 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뚫어본다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신비롭고 거룩하며 경이롭게 보일 겁니다. 시인들이 세상을 그렇게 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들장미 덤불은 이렇습니다.

 

비 내리는 저녁, 날은 어둑어둑해도

그대는 싱싱하고 순수합니다.

제 덩굴에서 선물하듯 손을 내 뻗지만

장미라는 자기 존재에 푹 빠져있지요.

 

바라지도 가꾸지도 않았건만

납작한 꽃잎은 벌써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그렇게 끝없이 자신을 뛰어넘고

형언할 수 없이 제 흥에 겨워

 

 

저녁의 상념에 잠겨 길가는 나그네를

장미는 외쳐 부릅니다.

, 걸음을 멈추고 제 모습 보세요, 보라고요.

보살펴주지 않아도 나는 걱정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겁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심판합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두렵게 합니다. 재물을 섬기라고 강요합니다. 다른 이들보다 더 부자로 살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위협합니다. 누가 더 죄가 많은지, 누가 심판을 크게 받는지, 누가 더 불행한지를 한순간도 잊으면 안 된다고 다그칩니다. 그게 바로 망하는 길입니다. 그게 바로 심판이라면 심판입니다. 저는 구더기가 끓고 유황불이 꺼지지 않는 지옥이 바로 지금 여기서 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만들지 않습니다. 만들었다고 해도 비워두십니다. 사람만이 지옥을 만듭니다. 위에서 인용한 릴케의 시에 나오는 들장미는 자신이 왜 왕궁의 정원에 피지 않았는지 한탄하지 않습니다. 왕궁에 있든지 들판에 있든지, 왕과 귀족이 보아주든지 아니면 새들이 보아주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햇살을 받으며,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비를 선물로 받을 수 있으니까요.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오늘 설교 본문 후반부 눅 13:6-9절에서 이 주제와 연관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삼 년을 기다렸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찍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포도원 일꾼이 주인을 말립니다. 자신이 한해만 더 관리해 볼 테니까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 작파합시다. 우리의 삶에는 종말이 이미 임박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충만한 순간이 이미 우리 눈앞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온갖 걱정거리와 자기 연민에 떨어져서 그걸 놓치고 삽니다. 지금 당장 망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1년이라는 집행유예가 주어졌습니다.

 

사랑하든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심판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온전하고 충만하게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을 지경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의 일상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밭에 묻힌 보물을 찾듯이 찾아보십시오. 그걸 찾게 되면 유레카!’를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1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