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4주, 2025년 3월 30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둘째 편지(5:20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새번역> 화해하라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과 불화를 빚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불화는 대단히 불편합니다. 불화로 인해서 종종 삶 전체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에서의 불화는 대충 이해가 가나 하나님과의 불화는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도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과 불화를 겪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더구나 화해하라니, 매일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에 쫓기는 우리에게는 거리가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과의 불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못 박혀 있습니다. 거의 숙명처럼 우리 삶에 밀착해 있어서 그걸 문제라고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불안과 분노와 걱정과 자존심 대결과 적개심이 우리의 삶에서 이어집니다. 교만하고 잘난척하고 우쭐대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생명 충만감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영혼의 만족이 크게 부족합니다. 이런 문제는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학력 수준이 올라가고 어느 정도 교양이 갖춰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다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합니다. 일용할 양식 때문에 다툰다면 이해가 갑니다. 동물들의 싸움은 아주 자연스러우니까요. 동물과 달리 우리에게는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의 과잉이 싸움의 근본 이유입니다. 자기를 삶의 중심에 놓는 삶의 태도가 넘쳐 흐른다는 뜻입니다. 최근 몇몇 영화의 주제로 잘 알려졌듯이 각자도생과 아귀다툼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치적으로 가장 빨리 민주화를 발전시켰고, 경제적으로 가장 빨리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유세를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자가 더 희생해야 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어느 정도 먹고 지내면서 소비 능력을 갖춰야만 나라 전체가 건강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어떻게 시작될까요? 오늘 설교 본문인 고전 5:16은 ‘그러므로’(Ὥστε)라는 부사로 시작합니다. 앞에 나온 내용을 다루는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복음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난민이나 기아선상에 놓인 이들이나 전쟁에 희생된 부녀자들을 돕는 소수의 활동가에게나 해당하지, 일반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삶이 아무리 고귀하다고 해도 평범한 우리가 모두 이타적인 박애주의자로 살 수는 없기도 하니까요. 바울은 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하는 걸까요? 우리 자신의 삶이 의미 없다는 말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집착할수록 내면적 삶이 빈곤해진다는 뜻입니다. 현대인의 삶이 종종 ‘번아웃’ 상태로 떨어진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서 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삶이 가능해야만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아기 엄마들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아기를 위해서 삽니다. 그들의 삶은 오로지 아기를 키우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게 엄마의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요즘이야 ‘육아독박’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육아가 어쩔 수 없는 노동으로 취급받긴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고 구원자이시기에 그를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습니다. 즉 구원을 받습니다. 이 사실이 초기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지난 2천 년 동안 이어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이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들을 설득할 자신은 없습니다. 신앙은 마치 시(詩)와 같아서 느낄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이 없으면 그 어떤 설명을 들어도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카타 사르카
제자들은 본래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믿은 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오해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면 높은 지위를 얻고 싶어 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예수께 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일부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혀 새로운 분으로 인식하고 경험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자신들에게 ‘살아있는 자’로 경험한 겁니다. 그게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어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셨다.’라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15절에는 ‘다시 살아나신 이’라고 했고, 다른 복음서나 서신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본질과 깊이를 경험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받아들여진 경험입니다. 아주 강렬한 종교적 경험이고, 시적 경험입니다. 그들은 이제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생명을 경험하니까 죽음의 두려움까지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16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세상 사람은 모두 육신(육체)을 따라서(κατὰ σάρκα) 삽니다. 가족도 기본에서는 육체관계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육체를 이어받습니다.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서 밥과 과일을 먹고 함께 여행도 다닙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도 ‘카타 사르카’입니다. 사회 활동도 그렇습니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이루려고 애쓰고, 기업가들도 기업을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학교생활도 그렇습니다. 학력을 키우는 일도 ‘카타 사르카’입니다. 그걸 잘하는 사람은 인정받고, 못하는 사람은 배척됩니다. 이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가 ‘카타 사르카’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 생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일들이 다 좋은 것이기는 하나 생명을 얻는 본질이 아니기에 바울은 16절에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를 위대한 선생이나 선지자로 알았으나 이제는 ‘카타 사르카’의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마치 판소리에서 득음의 차원으로 들어간 것처럼, 선승 불교에서 견성의 차원으로 들어간 것처럼 바울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한 겁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하여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된 겁니다. 우리가 귀에 따갑게 들을 정도로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해서 당장 천사처럼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카타 사르카’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 먹고 마시며 배설하고 잠자는 모든 육체적 활동과 무관하다는 게 아닙니다. 자녀도 키워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내면이 달라지는 겁니다. 삶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춤을 배우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춤꾼을 어느날 만났습니다. 그동안 알던 춤의 세계가 이 사람을 만난 뒤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춤의 기술에 머물지 않고 춤의 예술적 깊이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은 늘 그런 경험을 추구합니다. 글 쓰는 사람들도 글의 깊이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일에서도 삶이 새로워질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를 진실하게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이제 ‘육체를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겁니다. 육체적으로 인정받는 일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를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농사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대통령 자리를 줘도 거들떠보지 않듯이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의 화해보다는 심리 치료와 멋진 취미활동이나 사회봉사 등등이 힘든 인생살이에서 실용적으로 더 중요하지 않으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평균 수명도 늘어나고 경제 수준도 높아져서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시니어들도 여행은 물론이고 각종 문화 활동에도 적극 참여합니다. 삶을 풍요롭게 누리려는 겁니다. 그건 단지 즐거움일 뿐이지 영혼의 만족은 아닙니다. 재미있게 지낼 때는 잠시나마 모든 걱정과 근심을 잊을 수는 있으나, 그는 다시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아무도 함께해줄 수 없는 그런 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그는 외롭고 불안하며, 무료하기도 합니다. 돈과 건강과 교양만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모든 걸 만족스럽게 생각하면서 인생을 즐긴다고, 그러다가 죽을 때가 되면 죽을 준비까지 마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솔직한 말일까요? 돈과 건강과 교양 안으로 숨는 방식으로 자기를 속이는 건 아닐까요? 비유적으로, 그들은 정신병원이나 도박장이나 술집에서 자기 인생이 최고라고 떠벌리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꿈은 깨야만 그게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꿈에서는 자기가 공주가 될 수 있으나 꿈이 깨면 그게 다 망상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세련되고 남이 부러워하는 인생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모두 허황한 꿈은 아닐까요? 꿈에서 대통령이 되려고 기를 쓰고, 세계 최고 부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건 아닐까요?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삶이 꿈인지 실체인지를 분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경험
하나님 경험이 최선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나님과의 화해가 최선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근원이면서 궁극적인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보석을 발견한 사람만이 가짜 보석에 속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진짜 보석인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느냐가, 관건이겠지요. 저의 모든 설교는 이 한 가지 사실에 집중됩니다. 저 나름으로 삶의 진짜 보석인 하나님을 현실에서 경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길에서 바울이 저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라고 말한 뒤에서 마지막 절인 2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도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 righteousness of God)를 아는 게 곧 하나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종교적 마술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종교적 망상이나 자아도취가 아니라 가장 명백한 역사 경험이고 현실 인식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모르시는 분’입니다. 그에게서는 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 힘들어했으나 결국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맡겼습니다. 그런 사람을 여러분은 만나본 적이 있나요? 그런 분을 만나보고 싶지 않나요? 그런 분만 옆에 있다면 하나님이 옆에 있는 것처럼 영혼이 든든하지 않을까요? 그런 믿음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기준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곧 하나님 경험이고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기보다는 믿음의 언저리에서 맴도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예수께 왔다가 돌아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사람만 예로 든다면(막 10:17-22) 예수께 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했던 한 부자입니다. 실제의 삶에서나 종교적인 삶에서 나름 성실하게 살기는 했으나 영혼의 충만함이 부족하거나 삶의 타성에서 힘들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의 심정이 우리에게 잘 전달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은 기꺼이 수용할 수 있으나 재물을 포기하는 일만은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만으로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살 줄 모르고, 그럴 용기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해야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조금씩이라도 더 친밀해지고 그분께 더 집중하는 게 최선입니다. 화두를 붙들 듯이 집중하려면 다른 일은 제쳐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중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간다면, 그리고 그 말씀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면 먹고사는 문제를 비롯한 다른 것들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러분의 삶에서 그런 것들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대신 자유와 평화가 충만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삶에 정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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