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6주(종려주일), 2025년 4월 13일
오늘은 지난 3월 5일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한 사순절 절기 여섯째 주일이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이야기에서 이름이 붙은 종려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고난의 시간이 시작했다고 하여 내일부터 한 주간을 고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고난 주간이 끝나면 다음 주일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맞기 전에 우리는 쓰디쓴 십자가 처형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듯이 삶의 고통을 모르면 삶의 기쁨도 없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날 그에게 어떤 일이 그에게 벌어졌는지를 누가복음이 전하는 순서대로 따라가겠습니다. 금요일 이른 아침부터 해지기 전까지 대략 아홉 시간 동안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1-7)
눅 23:1절에 따르면 군중이 전날 밤에 체포된 예수를 끌고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당시는 성지 순례 차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유월절을 앞둔 시점이라서 평소 가이사랴에 주둔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는 치안 유지를 위해서 예루살렘 총독 관저에 나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빌라도 앞으로 끌려 나오기 직전에 산헤드린 공회에서 종교 재판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지 못했으나 예수의 유죄 증거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예수를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 조치했습니다. 종교 재판만으로는 사형시킬 수 없어서 로마 총독에게 사형시켜달라고 넘긴 겁니다. 고발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미혹했다. 둘째, 이 사람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했다. 셋째, 그가 스스로 왕이라고 사칭했다. 빌라도는 로마 제국의 고위 정치인이면서 지식인이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저들의 고발이 무고라는 걸 눈치를 챘습니다. 4절에서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군중은 빌라도의 말에 오히려 더 강하게 예수를 비난했습니다.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빌라도의 처지가 난처합니다. 자신이 볼 때는 유죄 증거가 부족하나 군중의 압력을 모르는 체할 수도 없습니다.
헤롯 왕 앞에서(8-12)
빌라도는 조언을 얻으려고 피고발인 예수를 갈릴리 지역의 왕인 헤롯에게 보냅니다. 헤롯도 유월절 절기를 맞아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를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그의 호기심을 끌 만한 예수에 관한 소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헤롯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유죄 이유를 헤롯 앞에서 강변했고, 헤롯과 군인들은 예수를 조롱하고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재판을 받는 동안 예수께서는 수없이 모욕당했습니다. 전날 대제사장 집에서 심문당할 때도 관리들이 예수를 ‘희롱’했습니다. 심지어 예수의 눈을 가린 채 주먹을 날리면서 당신이 선지자라고 하니 누가 주먹을 날렸는지 맞혀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간혹 이렇게 야비하게 나타납니다.
빌라도의 십자가 선고(13-25)
이야기는 다시 빌라도 법정으로 돌아갑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관리들과 군중들에게 예수에게서 아무런 유죄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까 ‘태형’을 선고하겠다고 말합니다. 15-16절은 이렇습니다.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나름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유대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한통속으로 사형시키라고 한 예수를 확실한 유죄 증거가 없다 하여 무죄 석방할 수는 없습니다. 거의 죽을 정도로 태형을 가한 뒤에 풀어주면 예루살렘 주민의 분노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자신의 법리적 양심도 어느 정도 지켜질 테니까요. 요즘도 오지의 이슬람권에서 이런 태형제도가 가끔 실행된다고 합니다.
군중들의 반응은 빌라도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했습니다.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였습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성경만으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조폭 보스처럼 폭력으로 세상을 혼란하게 만든 사람인지, 유대의 독립을 위해서 무장 투쟁에 나선 사람인지 말입니다. 마태복음 27:11절 이하를 따르면 유월절 명절마다 총독 특사로 죄인을 풀어주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예수를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는 군중이 폭력범 바라바를 선택하지는 않을 거로 예상한 겁니다. 그런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군중은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일종의 군중 시위였습니다. 21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이를 시위 구호 형식인 4-4조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빌라도 법정이 이 함성으로 가득했습니다. 빌라도는 물러서지 않고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으니, 태형으로 끝내겠다고 다시 군중을 설득했으나 군중의 힘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예루살렘 군중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게 선동당한 이들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전혀 모른 채 무조건 예수를 죽이는 데에 돌격대 노릇을 했습니다. 군중은 역사 변혁의 에너지이기도 하나 어떤 때는 역사 왜곡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히틀러 시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정치에서도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곤 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전쟁이나 마녀사냥이라는 유럽의 역사적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군중은 종종 어떤 대상을 악마화함으로써 상대적 만족감에 떨어집니다. 그런 현상에 휩쓸리면 이성적 판단은 마비됩니다. 작년 10월31일 차별금지법 반대를 위한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에 몰려든 군중 그리스도인도 비슷한 심리 현상에 떨어진 게 아닐까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26-43)
빌라도는 결국 군중의 압박을 버텨내지 못하고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했습니다. 요즘처럼 삼심제가 아니라서 이번 선고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26-43절에 나옵니다.
예수에게 벌어진 절체절명의 순간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십자가 처형에 선고된 사람은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직접 지고 법정부터 집행 장소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 틀은 상당한 무게입니다. 예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체력이 고갈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이 그 옆을 지나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했습니다. 당시 로마 정권에는 그런 권한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연민과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우는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이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묵시적 고난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조롱하면서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라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를 책망하면서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희극적으로 보이는 에피소드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 그 아래에서는 사형 집행인들이 예수의 옷을 놓고 제비뽑기했다고 합니다. 고통당하는 타인에 대한 무감각증이 극단화한 장면입니다. 사실은 오늘날도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노동 현장의 안전 불감증이 높은 이유가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데에 있는 거 아닙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올렸습니다. 34절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서 말하는 ‘저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교 고위층 인사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와 지금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들만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주민 모두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연루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는 일에, 죄 없는 이들을 제거하는 일에, 그런 이들을 조롱하는 일에 직간접으로 가담합니다. 오늘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7세 고시’라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말로 강요하는 것들이 영혼을 죽이는 일이 아닐까요?
예수 숨지다(44-49)
44절에 따르면 ‘제육시’, 그러니까 정오쯤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임하는 현상이 오후 세 시까지 이어졌습니다. 예수는 마지막으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새번역)라고 기도한 후에 숨졌습니다. 건강한 남자는 한 주일이나 두 주일 정도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통당한다고 합니다. 사형수의 몸무게가 못이 박힌 손바닥에 집중됩니다. 조금씩 더 찢어지는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진액이 몸을 타고 흘러 내려와 땅바닥에 흥건해집니다. 사형수는 비몽사몽의 순간을 반복하다가 천천히 죽는다고 합니다. 사체를 좋아하는 새나 들짐승이 주변을 맴돌 겁니다. 오가는 이들은 그 광경을 보고 로마 제국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십자가 처형은 너무 끔찍해서 로마 시민권이 있는 사람에게는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체력이 고갈된 상태라서 여섯 시간 만에 숨진 것으로 보입니다.
구원의 능력
표면적으로 볼 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불문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꺼림칙하거나 어리석은 일로 여겼습니다. 가문의 수치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는 연민의 대상이지 우리를 구원할 자가 아닙니다. 본문에서도 그런 관점이 나옵니다. 35절에서는 관리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37절은 군인들의 발언입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 행악자 중의 한 사람이 3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는 자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는 반론입니다. 현대인들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죽음 같은 거는 내 앞에서 꺼내지 말라고 질색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실제로 믿을 수 있을까요? 근거는 무엇인가요? 연봉 높은 직장에 들어가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못하는 십자가의 예수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나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있으면 보여달라.”라고 말하면 우리는 무슨 대답을 제시할 수 있나요?
바울의 대답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바울은 갈 6:14절에서(새번역)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그가 자랑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이 말하는 자랑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랑은 아주 분명하고 자극적이고 멋져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힘 자랑’을 좋아합니다. 그런 자랑거리가 없으면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상의 자랑거리가 더는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손아귀에 넣을만한 막강한 권력과 자랑거리라도 죽은 사람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처럼 말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이제 세상에 대해서 죽은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살아있으나 이미 죽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런 삶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비유를 들어야겠습니다. 여기 기타 연주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기타만 연주할 수 있으면 만족합니다. 부러운 게 하나도 없습니다. 친구가 결혼한다는 말을 들어도 축하하기는 하나 부럽지 않습니다. 이웃 사람의 아들과 딸이 판사가 되었다는 말을 들어도 축하해주기는 하나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그냥 기타를 연주할 수만 있다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기타로 인해서 그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세상은 그에 대해서 죽은 겁니다. 세상일이 그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세상일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세상일로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아첨하지 않고 세상 위에 군림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처럼 삽니다. 기타 연주의 세계를 아는 것만으로도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게 분명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는 어떤 차원의 삶이 열릴지 기대가 됩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18절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는 생명의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은 사람으로 산다는 말에 설득력이 있으려면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설령 예수의 십자가 처형처럼 고립무원의 억울하고 절망적인 운명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 어떤 불행한 운명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합니다. 역설적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그런 불행한 운명에 떨어질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앞에 어떤 운명이 벌어질지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외친 다음의 기도만은 놓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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