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후 4주, 2025년 2월 2일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대략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동네였습니다. 이번에 구글 지도로 나사렛을 찾아보았는데, 제법 규모가 있는 소도시였습니다. 주민이 8만 명 조금 못 미칩니다. 예수님의 고향이라는 유명세 탓으로 그리스도인이 주민의 30%나 된다고 합니다. 나사렛에서 오른쪽으로 25킬로미터 정도 가면 그 유명한 갈릴리 호수가 나옵니다. 건강한 남자라면 단 하루에도 왕복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전반부에 주로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오늘 설교 본문인 눅 4:21-30절에는 예수께서 나사렛을 찾아갔을 때 일어난 어떤 사건이 나옵니다. 눅 4:1절부터 읽는 게 맥락을 이해하기가 좋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오른쪽 요단 광야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40일 동안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신 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북쪽인 갈릴리 지역으로 자리를 옮기셨다고 합니다. 갈릴리 지역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에 관한 좋은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신 겁니다.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서 사 61:1 이하 말씀을 읽었습니다. 메시아 소명에 관한 구절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그럴만합니다. 그에 관한 소문이 여기 나사렛까지 퍼졌을 테니까요. 예수가 어떤 내용으로 설교할지, 소문대로 칭송을 받을만한지가 그들은 궁금했을 겁니다. 22절에 따르면 그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예수의 은혜로운 메시지에 놀라워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의심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 동네에서 친척이나 이웃으로 지내던 평범한 예수가 높은 수준의 율법 학자처럼 설교했으니까요.
예수께서 평범한 사람이었다가 언제 비범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출가하기 전의 예수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복음서에서 나오는 정보는 아주 단편적인 거 몇 개에 불과합니다. 외경에는 초능력을 행하는 어린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제법 나오지만, 신빙성이 떨어져서 교회가 정경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예수는 광야 40일 금식기도와 세 번에 걸친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면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교 버전으로는 그 순간에 해탈한 겁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받은 세례 사건도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각이 거기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사람의 전적인 변화는 이렇게 특별한 몇몇 순간에 벌어지는 거 같아도 실제로는 오래전부터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났기에 가능합니다. 음악의 대가가 되는 과정도 그렇고 물리학과 의학의 대가가 되는 과정도 비슷합니다. 예수께서도 천재들이 어려서부터 뭔가 비범한 생각을 하듯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어려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놀라운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나의 때’가 되었다고 보고 출가를 결심하고 유랑 랍비로 살았습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 앞에서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저 친구는 지금도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형제들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어울려서 살지 않는가? 그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체하다니, 믿을 수 없어. 민중들을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교주일지 몰라.’
23절부터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것을 요약하겠습니다. ‘당신들은 제가 갈릴리 호수 어촌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들을 여기 고향 나사렛에서도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엘리야 시대를(왕상 17장) 보십시오. 삼 년 동안 가물어서 흉년이 들었을 때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방 지역 시돈 땅 사렙다 과부에게만 갔습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 시대에도(왕하 5장)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나 아무도 치료받지 못하고 이방 수리아 사람인 ’나아만‘만 치료받았습니다. 여기 나사렛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제가 할 수 없습니다.’
회당에 모였던 고향 사람들은 크게 화가 났습니다.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이런 대목에서는 예수께서도 ‘한 성질’ 하시는 분으로 보입니다.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으면 대충 덕담이나 전하고 떠나면 충분한데 말입니다. 화가 치민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낭떠러지로 밀쳐내려고 했습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죽거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다치겠지요. ‘너 같은 인간은 앞으로 안 봤으면 좋겠다. 고향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다행히 예수께서는 군중들의 위해를 피해서 다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알아본다는 사실
나사렛 사람들은 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무엇인가를, 특히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사태를 ‘알아본다.’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주보 표지는 지난 금요일 1월 31일에 우리집 마당에서 찍은 튤립입니다. 설명 없이 사진만 보고 그것을 알아본 분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초봄이 되면 꽃이 나올 겁니다. 지금은 꽃이 숨어 있습니다. 세계의 본질은 숨어 있어서 알아보기 힘듭니다. 태어난 지 6개월 된 이담이가 엄마 아빠 품에 안겨서 예배에 종종 참석합니다. 우리는 그 아이의 미래를 모릅니다. 그 아이가 대학교 총장이 될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될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의 미래는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도 그렇습니다. 작곡가들은 숨어 있는 소리를 끌어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과 달리 작곡가는 소리를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현장과 온라인을 병행해서 예배드리는 중입니다. 2천 년 동안 내려온 그리스도교의 예배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교 영성을 경험하면서 기뻐하지만, 어떤 사람은 구경꾼으로만 참여합니다. 예배를 알아보는 사람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세계와 역사와 그 미래가 이렇게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약간이라도 눈치를 챈 사람들은 매 순간을 깨어 있는 영혼으로, 기도하는 영혼으로 삽니다. 마치 평생 처음 유럽이나 아프리카나 히말라야산맥을 여행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에서 중요한 내용의 하나는 메시아 비밀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씀했다는 뜻입니다. 이 교리에도 논쟁이 따릅니다. 저는 예수께서 비밀을 지키라고 말씀했는지 아닌지보다도 더 중요한 대목은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 자체가 비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얼굴이 하나님의 아들처럼 생긴 게 아닙니다. 그의 손바닥에 ‘메시아’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도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천사가 그를 따라다니지도 않았고, 후광이 비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평범한 유대인 모습이었습니다. 그에게서 일어난 기적도 특별한 게 아닙니다. 다른 이들도 그런 기적은 행합니다. 만약 예수에게 메시아라는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면 나사렛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그들을 책망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 이야기의 병행구인 막 6:1-6과 마 13:53-58에는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동네에서 쫓아내면서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려고 했다는 설명은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이 기록되던 시절의 그리스도교가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 시절보다 더 심하게 박해받았기 때문에 낭떠러지 운운하는 구절이 첨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공관복음이 일관되게 전하는 사실은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는 세 공관복음이 똑같이 말합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그들은 예수를 단순히 고향 사람으로만 알았습니다. 일상이 매일 똑같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삶의 기쁨이 찾아오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모르는데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사랑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으며, 사과를 직접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설명만 듣고 어떻게 사과 맛을 경험할 수 있나요?
저는 2천 년 전 나사렛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만나십니다. 오늘 그가 우리를 찾아오는 방식은 나사렛 시대와는 다릅니다. 당시에는 실존하는 예수였으나 지금은 그의 말씀입니다. 그가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가 예배 중에 함께하십니다. 기도 중에 함께하십니다. 어떤 분은 그런 것은 실제 함께하는 거와는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마치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진을 보고 자신들과 지금 함께한다고 느끼는 자식들처럼 말입니다. 그런 경험도 물론 소중합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부모가 함께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한다는 것은 차원 자체가 다릅니다. 돌아가신 부모의 사랑을 느낄 수는 있으나 그분들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구원자이기에 그가 함께하신다는 말은 곧 우리가 지금 여기서 구원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구원 경험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한 이유는 앞에서 짚은 대로 예수에 대한 고정관념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누구의 아들이라는 관점으로만 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고정관념에 묶인 채 살아가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생한 하나님 나라와 그의 구원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돈이 많아야만 행복할 수 있는 고정관념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아야만 행복하다는 고정관념도 비슷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행복한 사람을 저는 못 봤습니다.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은 많습니다. 실제로 행복한 사람과 그걸 애써 보이려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내면의 세계가 풍성하고 행복해야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21세기는 SNS의 발달로 남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살게 만듭니다. 매우 의존적인 인생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면의 심층인 영혼의 세계에 관심을 두는 종교를 외면합니다. 내면의 세계가 밥 먹여주나, 하는 태도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부탄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개인 소득이 가장 낮은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전체적으로 가난하지만 그들의 행복 지수는 높습니다. 그들은 헌법에 ‘전 국토의 60%는 개발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못 박아 놓았습니다. 모든 나라가 개발과 산업화와 건축과 토목에 목숨을 걸고 있으나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부탄의 길이 절대적으로 옳은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우리나라처럼 무한성장, 개발, 생산, 소비, 군사력 증강 등등을 목표로 삼는 것이 행복한 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선택한다면 부탄이나 ‘오래된 미래’의 라다크가 될 수 있겠지요. 뉴욕 맨해튼에서 잘나가는 금융가나 법조인으로 사는 사람이나 부탄 같은 나라에서 소박하게 양을 키우면서 사는 사람이나 모두 70-100년을 살다가 죽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한 내면의 세계가 풍성한 인생이 훨씬 낫겠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나사렛 사람이 아니라 알아본 제자들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일상적인 표현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삶의 깊이를 알아보고 구도 정진의 태도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딱 떨어지는 하나의 대답이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대답은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지구에 처음 온 외계인처럼 낯설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모든 게 새롭습니다. 신혼부부가 조금 세월이 지나면 권태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만약 상대방을 새롭게 볼 수 있다면 권태가 극복될 겁니다.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수행하듯이 인생을 살아야만 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새롭고 예쁘게 보일 겁니다. 예쁜 여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를 세상이 구별하지만, 그런 기준도 사람이 만든 겁니다. 문화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어느 정도 살찐 여자가 미인이었습니다. 그런 문화적인 관점을 넘어서 세상을 예쁘고 새롭고 낯설게 보는 능력이 창조 신앙이기도 합니다. 모든 세상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게 바로 창조 신앙 아닙니까. 따라서 정치적으로 서로 논쟁하고 투쟁할 수는 있으나 상대를 조롱하거나 혐오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조롱과 혐오나 무시와 차별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경험하고 있듯이 세상과 사람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이룬 게 많은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일수록 이런 선입관에 더 영향을 받습니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자기가 이룬 인생 업적을 포기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당시의 고위직에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위선자라고 비판하셨고, 거꾸로 당시 멸시의 대상이었던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지냈습니다. 후자에 속한 이들은 자기가 이룬 업적이 없기에 그럴만한 계기만 주어지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학적인 느낌으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자기가 이룬 경제와 정치 업적에 묶인 이들은 차창룡 시인의 <겨울나무>라는 시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예수를 배척한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7년 전 2018년 2월 4일자 설교에서 읽은 시입니다.
단순해지면 강해지는구나
꽃도 버리고 이파리도 버리고 열매도 버리고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벌거숭이로
꽃눈과 잎눈을 꼭 다물면
바람이 날씬한 가지 사이를
그냥 지나가는구나
눈이 이불이어서
남은 바람도 막아 주는구나
머리는 땅에 처박고
다리는 하늘로 치켜들고
동상에 걸린 채로
햇살을 고드름으로 만드는
저 확고부동하고 단순한 명상의 자세 앞에
겨울도 마침내 주눅이 들어
겨울도 마침내 희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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