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다섯 번째 교회입니다. ‘사대’라는 지역에 있었던 교회입니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동남쪽으로 50km 내려오고, 서머나에서는 동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내륙으로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산기슭과 강을 따라서 비옥한 골짜기에 있는 도시였기에 무역과 교통이 활발한 지역이었습니다.
“너는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써라. ‘하나님의 일곱 명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들을 알고 있으니 너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은 죽어 있구나’”(1절).
매우 호된 책망 같습니다. 앞서 나온 교회들과 달리 칭찬 없이 책망부터 주어집니다. 모든 상황과 대상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부검하신 뒤에 내린 진단입니다. 사데는 고대에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B.C. 1200년대 세워진 리디아 왕국의 도시로서 B.C. 6~7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도시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유적만 남아 있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너는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써라. ‘하나님의 일곱 명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들을 알고 있으니 너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은 죽어 있구나’”(1절).
매우 호된 책망 같습니다. 앞서 나온 교회들과 달리 칭찬 없이 책망부터 주어집니다. 모든 상황과 대상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부검하신 뒤에 내린 진단입니다. 사데는 고대에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B.C. 1200년대 세워진 리디아 왕국의 도시로서 B.C. 6~7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도시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유적만 남아 있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름이 있었지만,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에서 하나님께 책망을 심하게 받은 두 교회가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들이 있었던 도시에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도시가 유물이 되어 버린 것처럼, 교회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과거 그 지역 도시가 가진 명성처럼 교회도 살아있는 것처럼 이름이 있었지만, 실상은 죽었다는 냉혹한 진단을 내리셨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는 ‘살아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데라는 도시는 에베소나 다른 도시처럼 많은 이교 신전들이 있었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도 있었고, 서머나 교회나 버가모 교회 같은 상황이 똑같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나 버가모 교회에 있었던 것이 사데 교회에는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핍박’입니다. 만약 배교가 있었다면 책망이 나올 것이고, 순교가 있었다면 칭찬이 나올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나 버가모 교회는 핍박 속에서 순교의 영성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물론 책망받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 거짓된 이들을 단호하게 끊어 내지 못한 책망도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핍박에 맞서는 순교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핍박이 없었습니다. 핍박이 없는 것이 축복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점점 죽어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사데 교회처럼 되어 가는 교회의 환경을 보면 공통점이 핍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데 어떤 제약과 불이익도 받지 않는 사회, 예배도 있고, 봉사도 있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가 있는 지역은 모두 핍박이 전혀 없었습니다. 반대로 핍박이 있는 나라와 사회, 교회들은 존재감도 없고 실상은 핍박에 눌려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있습니다. 핍박이 없는 교회가 모두 죽은 것은 아닙니다. 핍박이 없는 지역에 있을지라도 살아있는 교회로 존재하는 교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죽은 교회의 특징은 첫째, 좋았던 과거에 집착해서 어떤 변화도 거부합니다. 둘째, 내부지향적으로만 예산을 사용해서 그들만의 교회를 추구합니다. 셋째, 자신만을 위한 신앙을 추구하면서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대한 순종이 사라졌습니다. 반면 한때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교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전통을 위한 전통을 내려놓고 바른 지표를 언제나 사용합니다. 둘째, 끈질지고 강하게 함께 기도로 연합합니다. 셋째, 아플지라도 연합을 방해하는 독소를 제거합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에 대한 평가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영혼,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평가이기도 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생명은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죽은 생명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을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을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뿌리가 끊긴 생명은 죽은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입니다.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어있는 영혼에게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원토록 살아있는 분,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죽어도 다시 사는 자로 살아있는 자입니까? 죽었으나 다시 사신 예수님처럼, “나는 살아있는 자”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아 있는 신앙의 특징
깨어 있음, 진정성, 순결
깨어 있음, 진정성, 순결
“너는 깨어서 죽어가는 남은 것을 굳건히 하여라. 나는 네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케 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너는 어떻게 받고 들었는지 기억해 순종하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이니 내가 어느 때 네게 올지 네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2~3절).
살아있는 신앙의 첫 번째 특징은 ‘깨어 있음’입니다. 죽음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생명 없는 자처럼 살아가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나 죽어가는 남은 것을 굳건히 합니다. 우리 삶에 죽음에 휩쓸리는 것들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에 우리가 소비되는 것,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는 것, 방종에 빠지는 것, 우리의 신앙과 삶이 불일치 하는 것이 죽음에 휩쓸려 가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살아있는 자들이기에 생명이 죽음을 깨워서 남은 것들을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살아있는 신앙의 두 번째 특징은 ‘진정성’입니다. 사데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온전케 된 것을 찾지 못했다고 책망받았습니다. 온전함이란 진정성입니다. 위선과 가식이 없는 진실함입니다. 죽어있는 신앙은 언제나 시선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식하므로 가식을 행합니다. 진정성 있는 신앙,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 하나님과 나와의 진정성 있는 관계 속에 살아있는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신앙의 세 번째 특징은 ‘순결’입니다. 사데 교회의 죽음은 ‘더러움’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던 이세벨을 따르는 이들처럼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은밀히 숨어있는 더러움이 있었고, 그 더러움은 누룩처럼 조용히 퍼져 나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너희는 하얗게 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겉으로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 차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데 교회는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깨어남, 진성성 있는 믿음을 회복하고, 순결하라고 강조하시면서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전혀 무엇인지 모른다면 기억하라는 말씀을 안 하셨을 것입니다. “기억해 보면 너희들이 할 수 있다. 깨어나면 돌이킬 수 있다. 순종하려고 하면 순종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데 교회에 옷을 더럽히지 않는 몇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남은 자들이 있는 것처럼, 더럽혀지지 않는 사데 교회 남은 자들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의 첫 번째 특징은 ‘깨어 있음’입니다. 죽음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생명 없는 자처럼 살아가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나 죽어가는 남은 것을 굳건히 합니다. 우리 삶에 죽음에 휩쓸리는 것들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에 우리가 소비되는 것,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는 것, 방종에 빠지는 것, 우리의 신앙과 삶이 불일치 하는 것이 죽음에 휩쓸려 가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살아있는 자들이기에 생명이 죽음을 깨워서 남은 것들을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살아있는 신앙의 두 번째 특징은 ‘진정성’입니다. 사데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온전케 된 것을 찾지 못했다고 책망받았습니다. 온전함이란 진정성입니다. 위선과 가식이 없는 진실함입니다. 죽어있는 신앙은 언제나 시선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식하므로 가식을 행합니다. 진정성 있는 신앙,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 하나님과 나와의 진정성 있는 관계 속에 살아있는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신앙의 세 번째 특징은 ‘순결’입니다. 사데 교회의 죽음은 ‘더러움’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던 이세벨을 따르는 이들처럼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은밀히 숨어있는 더러움이 있었고, 그 더러움은 누룩처럼 조용히 퍼져 나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너희는 하얗게 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겉으로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 차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데 교회는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깨어남, 진성성 있는 믿음을 회복하고, 순결하라고 강조하시면서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전혀 무엇인지 모른다면 기억하라는 말씀을 안 하셨을 것입니다. “기억해 보면 너희들이 할 수 있다. 깨어나면 돌이킬 수 있다. 순종하려고 하면 순종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데 교회에 옷을 더럽히지 않는 몇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남은 자들이 있는 것처럼, 더럽혀지지 않는 사데 교회 남은 자들입니다.
두 가지 약속, 흰 옷과 생명책
“그러나 사데에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니 그들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사람은 그들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나는 결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4~5절).
두 가지를 약속합니다. 첫째, 흰옷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흰색은 <계시록>에 자주 나옵니다. 흰 돌, 흰 구름, 흰 말, 흰 보좌는 순결의 상징이며, 승리의 상징입니다. 완전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려면 순결해야 하는데,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로 우리의 옷을 깨끗이 씻어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흰 옷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 어린양이 통치하는 세 예루살렘에서 필수품은 흰 옷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아닌 그리스도가 선물로 주시는 의로움입니다.
둘째,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 버리지 않을 거라는 약속입니다. <출애굽기>부터 시작해서 예언서에도 하나님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이름을 적은 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기억이고, 인정인데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생명책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이름은 없기에 생명책이라고 부릅니다. 성도 등록 명부가 아닙니다. 성도 명부에는 이름이 있어도 생명책에는 이름이 없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을까요? 성도 명부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책에 여러분 이름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는 믿음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이름만 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두 가지를 약속합니다. 첫째, 흰옷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흰색은 <계시록>에 자주 나옵니다. 흰 돌, 흰 구름, 흰 말, 흰 보좌는 순결의 상징이며, 승리의 상징입니다. 완전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려면 순결해야 하는데,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로 우리의 옷을 깨끗이 씻어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흰 옷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 어린양이 통치하는 세 예루살렘에서 필수품은 흰 옷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아닌 그리스도가 선물로 주시는 의로움입니다.
둘째,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 버리지 않을 거라는 약속입니다. <출애굽기>부터 시작해서 예언서에도 하나님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이름을 적은 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기억이고, 인정인데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생명책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이름은 없기에 생명책이라고 부릅니다. 성도 등록 명부가 아닙니다. 성도 명부에는 이름이 있어도 생명책에는 이름이 없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을까요? 성도 명부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책에 여러분 이름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는 믿음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이름만 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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