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5) 두아디라교회 (계 2:18~29) / 이재훈 목사

새벽지기1 2025. 2. 9. 06:23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바벨론’이라고 불리는 세력입니다. 구약 시대의 바벨론이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을 바벨론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모든 시대에 바벨론 같은 제국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보여준 제국의 특징들이 로마 제국에도 나타났고, 그 모습들은 이 시대에도 나타났으며, 미래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바벨론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에도 나타났고, 미래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세력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하나님께 칭찬 받은 이유는 바벨론의 영향력을 얼마나 잘 극복하고 끊어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책망 받은 내용은 바벨론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탄, 곧 용의 세력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제국인 바벨론에 의해서 이루어진 죄들은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우상숭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합니다. 둘째, 음행을 조장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합니다. 셋째, 자신의 번영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나 나라들을 학대하거나 이용하는 죄를 범합니다. 넷째,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을 학대하고 죽이는 죄를 범합니다. 
모든 시대, 모든 성도의 도전
 
이 시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도 바벨론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바벨론의 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적이 없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바벨론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시기 교회는 더욱 정절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도 책망이 있었지만 칭찬받을 만한 내용이 있었던 것을 볼 때 바벨론으로부터 그들이 박해받는 시대에는 교회가 정결했고,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바벨론 같은 제국들, 여러 나라와 민족들을 보면 어떤 세계관에 의해서, 또 통치자들에 의해서, 국가 체제에 의해서 핍박받는 교회들은 정결합니다. 목숨 걸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는 서구 교회입니다. 대한민국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박해의 시대 교회는 오히려 정결했지만, 유혹의 시대 교회는 바벨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시대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도록 하는 압력이 큰 유혹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소아시아교회에 로마 황제 숭배를 강조했을까요? 로마가 볼 때 소아시아는 변방입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해야 통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변방에 있는 통치자들을 인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얼마나 많이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일으키는 가입니다. 많은 백성이 충성심을 일으키면 인정받는 것이고, 충성심이 떨어지면 그 통치자는 인정 못 받는 것입니다.  
또 다른 형태의 바벨론은 교회가 정치권력과 하나 되는 유혹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두드러진 시기가 콘스탄티누스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까지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국가와 교회가 일치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때를 교회가 바벨론에 사로잡힌 기간이라고 평가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회에 우호적이고 친화적일 때 성도들은 매우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때부터 교회가 바벨론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었고, 하나님 말씀이 아닌 세상의 검으로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중세 교회는 더 심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국가권력 위에 있었습니다. 그때를 ‘어둠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바벨론 아래서 어떻게 어린양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갈 것인가가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도전입니다. 어린양을 따라 새 예루살렘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용을 따라 바벨론에서 살 것인가 입니다. 용의 영향 아래 있는 바벨론의 통치자들은 어린양을 미워하며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지만, 어린양은 이길 것이고, 어린양을 따른 이들도 이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핵심메시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대적해 싸울 것이나 어린양이 그들을 이길 것이다. 이는 그가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곧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충성된 사람들도 이길 것이다”(계 17:14).
바벨론은 어린양을 대적하지만 어린양은 이길 것입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도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세력도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 무너진 교회가 있다면 바벨론과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처럼 살아가려고 할 때 교회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때로 패배한 것 같지만, 때로는 용이 승리한 것 같지만, 어린양을 따르는 길만 인내하며 걸어간다면 어린양이 이기신 것처럼 반드시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도 이길 것입니다. 이 확신을 일곱 교회 성도들과 이 시대 성도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어린양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왔지만, 다시 오실 때 온전히 완성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같은 믿음
두아디라 교회 같은 믿음
‘두아디라’는 일곱 도시 중에서 가장 작습니다. 작지만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교차로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예배소 두란노서원에서 말씀으로 양육한 사람들이 사역자가 됐을 것이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 사역자로 파송 되면서 두아디라에도 복음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두아디라는 장인과 상인의 도시였습니다. 다른 어느 도시보다 무역 길드가 발달했습니다. 길드는 오늘날 조합, 협회 같은 것인데, 강력하게 연대되어 있는 경제 공동체입니다. 당시 길드에 참여하지 않고 경제 활동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만난 ‘루디아’라는 여인이 두아디라 출신입니다. 루디아의 직업이 자주색 옷감장수였습니다.  
“너는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써라. ‘눈이 불꽃같고 발이 청동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신다’”(18절). 
예수님이 여기에서 처음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소개하시며 신성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대상을 꿰뚫어 보십니다. 마음과 의도를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청동같이 빛난다’는 것은 불로 제련된 청동이라는 것입니다. 발이 불로 제련된 청동이라면 어떠한 반대와 핍박과 대적도 견뎌내고, 흔들리지 않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를 평가하십니다. 
“나는 네 행위들과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네 인내를 알고 너의 처음 행위들보다 나중 행위들이 더 낫다는 것을 안다”(19절). 
두아디라 교회에는 신앙의 미덕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입니다. 신앙의 소중한 가치이자 필수적인 자질들입니다. 그 뒤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의 처음 행위들보다 나중 행위들이 더 낫다”고 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신앙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믿음에 안주하지 않고 날마다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와 대조적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겉으로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 나중의 사랑과 믿음, 봉사와 인내가 더 훌륭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과거에 더 좋았다면 에베소 교회 같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과거에도 좋았지만, 오늘의 믿음이 더 좋다면 두아디라 교회 같은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과거를 우려먹을 수 없습니다. 믿음에는 달인이 없습니다. 어제까지 믿음으로 살아도 오늘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현재형이기 때문에 오늘 내가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훌륭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포도나무의 과실이 더 많아지듯, 금속을 제련할수록 순결해지듯 믿음은 그래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최고의 선물
“그러나 내가 네게 책망할 것이 있으니 내가 이세벨이란 여자를 용납하는구나. 그 여자는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며 내 종들을 가르치고 유혹해 그들로 음행하게 하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게 했다”(20절).
이세벨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악명 높은 여인입니다. 아합왕의 아내로서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여인입니다. 이세벨의 아버지 아스다롯은 성적인 부도덕함을 범람하게 하는 우상으로 유명합니다. ‘이세벨’ 이름의 뜻은 아이러니하게도 ‘순수한’, ‘순결한’ 이란 뜻인데, 삶은 정반대였습니다. 첫 번째 이세벨은 1천 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악령이 주후 1세기 선지자를 자처하는 한 여인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구약의 이세벨과 시대는 다르지만 동일한 원리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세벨’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두아디라 지역은 무역 길드가 번성했는데, 경제적으로 유지하려면 길드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문제는 길드들이 각자 수호신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회원들에게 예식과 연회에 참석하도록 강요했는데 그 의식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고, 수호신을 숭배하는 것이고, 음행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생존권이 걸린 문제지만 그 일에 참여함으로써 우상을 숭배하게 되고, 음행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큰 고민이었습니다. 이 고민을 하는 성도들에게 나타나 길을 제시 해준다고 했던 여인이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우상을 섬기라는 말은 안 하지만 거짓으로 속이며 합리화함으로써 사람들이 우상에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어린 양을 따르는 것과 용을 따르는 것이 혼합될 수 있는 것처럼 속였습니다. 모든 시대 교회에도 이세벨의 가르침이 항상 들어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배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용해서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합니다. 교회 안 다니게 하는 배교가 아니라 다니면서 다른 것을 믿고 따르게 하는 배교가 바로 이세벨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을 알아야 된다면서 타락한 문화에 참여하는 것을 합리화합니다. 하나님이 이세벨과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 여자는 음행을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보라. 내가 그 여자를 병상에 던질 것이며 그 여자와 더불어 간음하는 사람들도 그 여자의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큰 환란에 던져질 것이다. 또 내가 그 여자의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일 것이다. 그러면 모든 교회가 내가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이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의 행위대로 각 사람에게 갚아 주겠다”(21~23절). 
하나님은 성도들의 거룩을 위해서 심판하십니다. 또한 이세벨을 따르지 않고 남은 자들을 격려하십니다. 회개가 필요한 자들에게는 무섭게 경계하시지만, 충성된 자들에게는 격려와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가르침을 받지 않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 두아디라에 있는 너희 남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아무 짐도 지우지 않을 것이다”(24절). 
어느 시대 교회라도 거짓된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는 남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함께 나라들을 다스릴 권세입니다. 쇠지팡이로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전혀 어려움 없이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샛별, 새벽별을 주십니다. 샛별은 곧 날이 밝을 것을 보여주는 선물입니다. 고난의 기간은 지나갈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샛별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빛나는 새벽별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가장 큰 최고의 선물입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성도들의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샛별처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얼마나 끈기 있게 견디며 남은 자로 살아갈 것입니까? 시대의 거짓과 부정, 음란과 잘못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두아디라의 남은 자들이 될 것입니까? 아니면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 바벨론에 포로가 될 것입니까? 거룩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고 때로 경제적 불이익도 감수할 것입니까? 아니면 거짓과 불법과 음란과 악독과 우상숭배 참여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에 참여할 것입니까?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다스림을 받을 것입니까? 아니면 남은 자가 되어 끝까지 인내하며 예수님을 만나 다스리는 권세를 누릴 것입니까? 이 시대 바벨론과 싸워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