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예수님에 대한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역사의 마지막 때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역사 전체를 보여주고 있으며, 예수님이 왜 역사의 중심이시고, 역사를 넘어 영원한 나라에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을 주로 ‘어린 양’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장에서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서 있고, 그와 함께 144,000명이 서 있다”고 말씀합니다. 시온산은 어린 양 임재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시편> 2편 6절에서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144,000명은 문자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숫자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표현하는 숫자입니다. 완전 수 12로 이루어지는 자승의 영역에 속한 숫자가 144,000입니다. 하늘의 승리를 경험한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시온산에 서 있는 어린 양과 함께 사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공동체 성도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분의 아버지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이름이 쓰여 있다’는 것은 소속과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어린 양 때문이고, 어린 양의 아버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어린 양의 은혜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함께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쓰여 있다’는 것은 어린 양이신 그분이 하나님과 동격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분임을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곳곳에 이 어린 양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분으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함께 공유하고, 통치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하늘의 열린 문으로 바라본 세상은 이 어린 양의 보좌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어린 양이신 예수님과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1절과 <요한계시록> 7장 17절에도 아버지 하나님이 어린 양과 함께 보좌를 공유하시는 장면이 계속 나옵니다. 이 어린 양은 ‘죽임당한 어린 양’입니다. 힘이 없고 유약해서 희생된 게 아닙니다. 모든 능력과 지혜가 있으신 분이기에 자발적으로 희생하신 것입니다.
어린 양과 사자,
예수님의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
예수님의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
“그러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말했습니다. ‘울지 마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했으니 그 책과 그 일곱 인을 열 것이다’ 또 나는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죽임을 당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5~6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그 어린 양의 본래 정체는 유다 지파의 사자입니다. 사자라고 생각하고 보았던 것의 실상이 죽임당한 어린 양이요, 죽임당한 어린 양으로 나타난 분의 실상이 사자입니다. 그분이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는데, 일곱 뿔은 완전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일곱 눈은 완전한 지혜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능력과 지혜를 가진 사자이신 그분이 어린 양으로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왜 사자처럼 강한 존재가 어린 양처럼 연약한 존재로 죽임을 당합니까? 사자의 권세를 가진 분이 어찌하여 어린 양처럼 희생당합니까? 정복자인 사자로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어린 양으로 존재한단 말입니까? 완전한 능력과 지혜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 그분은 사람들을 구속해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곧 승리자요, 정복자요, 통치하시는 왕이시며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자를 보려는 이들은 먼저 어린 양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사자로서 오실 것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면 사자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린 양과 사자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사자의 영광이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복음과 성령 안에서 그 영광을 보지만, 다시 오실 때는 그 영광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그 어린 양의 본래 정체는 유다 지파의 사자입니다. 사자라고 생각하고 보았던 것의 실상이 죽임당한 어린 양이요, 죽임당한 어린 양으로 나타난 분의 실상이 사자입니다. 그분이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는데, 일곱 뿔은 완전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일곱 눈은 완전한 지혜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능력과 지혜를 가진 사자이신 그분이 어린 양으로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왜 사자처럼 강한 존재가 어린 양처럼 연약한 존재로 죽임을 당합니까? 사자의 권세를 가진 분이 어찌하여 어린 양처럼 희생당합니까? 정복자인 사자로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어린 양으로 존재한단 말입니까? 완전한 능력과 지혜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 그분은 사람들을 구속해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곧 승리자요, 정복자요, 통치하시는 왕이시며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자를 보려는 이들은 먼저 어린 양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사자로서 오실 것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면 사자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린 양과 사자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사자의 영광이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복음과 성령 안에서 그 영광을 보지만, 다시 오실 때는 그 영광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사람들이며,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로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4절 b).
어린 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갑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 받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의 세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어린 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갑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 받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의 세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또 나는 하늘로부터 많은 물소리 같고 큰 천둥소리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소리는 하프 켜는 사람들의 하프 소리 같았습니다. 그들은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만 4,000명밖에는 아무도 그 노래를 배울 수가 없습니다”(2~3절).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새 노래는 구속받은 사람들만 부를 수 있습니다. 구속받은 심령, 구속받은 영혼에게서만 나오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는 하늘로부터 오는 많은 물소리가 같고, 큰 천둥소리 같고, 하프 켜는 소리 같다고 합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셀 수 없는 큰 무리, 모든 시대 구속받은 이들에게 나오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새 노래는 이 땅에서도 불려 질 것입니다.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르며 말했습니다. ‘주는 그 책을 취해 인들을 떼기에 합당하십니다. 이는 주께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들로부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구속해 드리셨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께 나라와 제사장들이 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땅 위에서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9~10절).
새 노래의 주제는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으로 구속받은 이들이 하나님과 함께, 어린 양과 함께 통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 것을 기뻐하고, 어린 양과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을 기뻐하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직 구속받은 이들만, 어린 양으로 구속받은 이들만 부를 수 있는 새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 이들만 부르는 노래입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또 나는 하늘로부터 많은 물소리 같고 큰 천둥소리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소리는 하프 켜는 사람들의 하프 소리 같았습니다. 그들은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만 4,000명밖에는 아무도 그 노래를 배울 수가 없습니다”(2~3절).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새 노래는 구속받은 사람들만 부를 수 있습니다. 구속받은 심령, 구속받은 영혼에게서만 나오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는 하늘로부터 오는 많은 물소리가 같고, 큰 천둥소리 같고, 하프 켜는 소리 같다고 합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셀 수 없는 큰 무리, 모든 시대 구속받은 이들에게 나오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새 노래는 이 땅에서도 불려 질 것입니다.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르며 말했습니다. ‘주는 그 책을 취해 인들을 떼기에 합당하십니다. 이는 주께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들로부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구속해 드리셨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께 나라와 제사장들이 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땅 위에서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9~10절).
새 노래의 주제는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으로 구속받은 이들이 하나님과 함께, 어린 양과 함께 통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 것을 기뻐하고, 어린 양과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을 기뻐하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직 구속받은 이들만, 어린 양으로 구속받은 이들만 부를 수 있는 새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 이들만 부르는 노래입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흠 없는 사람들
둘째,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들이니 이는 그들이 정절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거짓을 찾을 수 없으니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4~5절).
‘흠이 없다’는 것은 죄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어린 양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이미 받은 자로써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물었습니다. ‘이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누구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는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내 주여, 당신이 아십니다.’ 그때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들은 큰 환란으로부터 나오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옷을 씻어 희게 했습니다’”(계 7:13~14).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흰 옷을 입은 큰 무리입니다. 의롭게 된 죄인들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어린 양의 의로움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로 옷 입고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동일하게 대해 주십니다.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정결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보혈로 의롭게 된 사람들을 <요한계시록>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합니다. 신부는 정결합니다. 신랑과 연합함에 있어서 정절을 지킨 자여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음란한 여인’으로 표현되는 본문의 여인은 사단이고, 사단에게 정복된 바벨론입니다. 로마 황제 숭배를 이끄는 이교적인 사상들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정결하게 하는 것,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동시에 의롭고 정결한 삶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들이니 이는 그들이 정절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거짓을 찾을 수 없으니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4~5절).
‘흠이 없다’는 것은 죄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어린 양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이미 받은 자로써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물었습니다. ‘이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누구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는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내 주여, 당신이 아십니다.’ 그때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들은 큰 환란으로부터 나오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옷을 씻어 희게 했습니다’”(계 7:13~14).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흰 옷을 입은 큰 무리입니다. 의롭게 된 죄인들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어린 양의 의로움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로 옷 입고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동일하게 대해 주십니다.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정결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보혈로 의롭게 된 사람들을 <요한계시록>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합니다. 신부는 정결합니다. 신랑과 연합함에 있어서 정절을 지킨 자여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음란한 여인’으로 표현되는 본문의 여인은 사단이고, 사단에게 정복된 바벨론입니다. 로마 황제 숭배를 이끄는 이교적인 사상들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정결하게 하는 것,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동시에 의롭고 정결한 삶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죽기까지 인내하는 사람들
셋째, 어린양을 따른 이들은 ‘죽기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다”(12절).
“그들은 어린 양의 피와 그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인해 그를 이겼고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계 12:11).
성도들의 인내,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이들이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는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 많은 성도가 죽임 당했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어린 양을 따랐습니다. 악한 권력이 지배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그들은 어린 양을 따르기에 믿음으로 인내하며 충성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영원한 안식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까지 인내하심으로 부활을 맞이하신 것처럼, 핍박 아래 죽기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는 성도들도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고난을 피할 길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예비된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형제이며 예수 안에서 환란과 나라와 인내를 함께 나누는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밧모 섬에 있었습니다”(계 1:9).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다”(12절).
“그들은 어린 양의 피와 그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인해 그를 이겼고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계 12:11).
성도들의 인내,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이들이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는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 많은 성도가 죽임 당했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어린 양을 따랐습니다. 악한 권력이 지배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그들은 어린 양을 따르기에 믿음으로 인내하며 충성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영원한 안식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까지 인내하심으로 부활을 맞이하신 것처럼, 핍박 아래 죽기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는 성도들도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고난을 피할 길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예비된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형제이며 예수 안에서 환란과 나라와 인내를 함께 나누는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밧모 섬에 있었습니다”(계 1:9).
예수 안에서 환란과 나라와 인내를 함께 겪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환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참 자녀임을 증거하는 표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장차 참여하게 될 영광과 소망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어린 양을 따르는 삶은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순풍에 돛을 단 항해가 아닙니다. 어떠한 고난도 인내로 헤쳐 나가며 승리하는 영광을 맛보는 삶입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고난에 대한 해결책은 그것을 없애주시는 게 아닙니다. 어린 양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인내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어린 양처럼 죽임 당하심으로 얻은 승리를 함께 경험하는 이들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며, 죽기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킵니다.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는 이들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 세계로 흩어진 선교사님들은 어린 양을 따르기에 거기 가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그곳에서 어린 양을 따른 이들이고, 우리는 이곳에서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새 노래가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정결케 한다면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죽기까지 인내한다면 영광의 승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며, 죽기까지 인내하는 믿음의 싸움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자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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