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현대 소설가 엔도 슈샤쿠가 쓴 <침묵>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일런스’라는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배경으로 쓴 역사 소설입니다. 소설이지만 당시 일본 당국이 어떻게 교회를 핍박 했는지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 일본 당국은 일본인들만 박해하고 배교시킨 게 아니라 외국인 선교사들까지 배교시킨 것으로 나타납니다. 선교사들을 먼저 배교시켜야 자국민들이 복음화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소설 초반부에 어떻게 고문 했는지가 나오는데 농민들의 코와 입을 정육점의 고기처럼 거꾸로 매달아 죽였는데 바로 그 옆방에 그 사람을 전도한 선교사를 불러다 놓고 그 소리를 듣게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배교한다고 해도 풀어 주지 않고 선교사까지 배교해야만 풀어줬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 페레이라가 고문 속에서 배교했다는 소식을 보고하고, 이를 조사하기 위해서 제자 두 명이 일본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먼저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가 로드리고 신부에게 외칩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이 엄청난 핍박 속에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셨어.”
우리 인생에서도 고난을 만났는데 하나님이 전혀 도와주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면 시험과 배교에 빠진 것처럼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믿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C.S.루이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결혼 대상자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도 결혼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회복되기를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C.S.루이스는 아내를 암으로 먼저 천국에 보내고 슬퍼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원통함으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다스리시다가 환란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을 주시는데 인색한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은 것 같을 때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이 왜 숨어 계시는지 호소하는 기도를 여러 곳에서 드렸습니다.
“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시며 어찌하여 내가 어려울 때 숨어 계십니까”(시 10:1).
“오 여호와여, 깨어나소서. 왜 주무시고 계십니까? 일어나 우리를 영영 외면하지 마소서. 왜 그렇게 주의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처참함과 억압당하는 것을 잊고 계십니까”(시 44:23~24).
엄청난 상실과 고난을 경험했던 구약의 욥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 가도 그분이 계시지 않고 뒤로 가도 그분을 찾을 수 없구나. 그분이 왼쪽에서 일하고 계실 때도 그분을 뵙지 못하고 그분이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도무지 만나 뵐 수 없구나”(욥 23:8~9).
하나님이 숨어 계신 것 같은 상황, 고난도 힘들지만 고난 속에서 침묵 하시고 숨어계신 것 같은 하나님께 느끼는 실망이 믿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충격입니다. 크리스천 작가 필립 얀시는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무신론자이다. 무신론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를 비롯해 “하나님 왜 숨어 계십니까?”라고 부르짖는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그분을 신실하게 믿고, 의지하고,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거나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대하는 게 없기에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시국을 보면서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숨어 계십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과 친밀함을 나누셨던 예수님도 숨어 계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십자가의 하나님은 감추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의 모욕과 고통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중세 가톨릭이 발견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시며 어찌하여 내가 어려울 때 숨어 계십니까”(시 10:1).
“오 여호와여, 깨어나소서. 왜 주무시고 계십니까? 일어나 우리를 영영 외면하지 마소서. 왜 그렇게 주의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처참함과 억압당하는 것을 잊고 계십니까”(시 44:23~24).
엄청난 상실과 고난을 경험했던 구약의 욥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 가도 그분이 계시지 않고 뒤로 가도 그분을 찾을 수 없구나. 그분이 왼쪽에서 일하고 계실 때도 그분을 뵙지 못하고 그분이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도무지 만나 뵐 수 없구나”(욥 23:8~9).
하나님이 숨어 계신 것 같은 상황, 고난도 힘들지만 고난 속에서 침묵 하시고 숨어계신 것 같은 하나님께 느끼는 실망이 믿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충격입니다. 크리스천 작가 필립 얀시는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무신론자이다. 무신론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를 비롯해 “하나님 왜 숨어 계십니까?”라고 부르짖는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그분을 신실하게 믿고, 의지하고,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거나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대하는 게 없기에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시국을 보면서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숨어 계십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과 친밀함을 나누셨던 예수님도 숨어 계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십자가의 하나님은 감추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의 모욕과 고통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중세 가톨릭이 발견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실 때마다
제한하시고 감추실 수밖에 없다
제한하시고 감추실 수밖에 없다
“구원자이신 이스라엘 하나님, 주께서는 참으로 숨어 계신 하나님이십니다”(15절).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심판받아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회복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은 이사야의 고백대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정반대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집트가 벌어들인 소득과 에티오피아가 벌어 놓은 재물이 네게로 넘어오고 스바의 거인들이 네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이 네 뒤에서 터벅터벅 걸으며 사슬에 묶인 채 네게로 넘어올 것이다. 그들이 네 앞에서 절하고 빌면서 틀림없이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그밖에 다른 누구도 없습니다. 그밖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14절).
14절에서는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계시고 그밖에 하나님은 없다”고 증거하게 될 것이고, 그들이 터벅터벅 걸어 올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15절의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15절은 현재 상황입니다. 15절은 이방 민족들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상황입니다. 14절은 미래 이야기입니다. 현재는 하나님이 숨어 계심으로 조롱당하고 멸시당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14절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숨어계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끌려가지만, 이 과정을 통해 14절의 예언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방 민족이 너희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그밖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고 고백하는 날이 올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심으로 자신을 더 나타내시고, 더 영광 받으시고, 더 적극적으로 일하십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심판받아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회복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은 이사야의 고백대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정반대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집트가 벌어들인 소득과 에티오피아가 벌어 놓은 재물이 네게로 넘어오고 스바의 거인들이 네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이 네 뒤에서 터벅터벅 걸으며 사슬에 묶인 채 네게로 넘어올 것이다. 그들이 네 앞에서 절하고 빌면서 틀림없이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그밖에 다른 누구도 없습니다. 그밖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14절).
14절에서는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계시고 그밖에 하나님은 없다”고 증거하게 될 것이고, 그들이 터벅터벅 걸어 올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15절의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15절은 현재 상황입니다. 15절은 이방 민족들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상황입니다. 14절은 미래 이야기입니다. 현재는 하나님이 숨어 계심으로 조롱당하고 멸시당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14절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숨어계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끌려가지만, 이 과정을 통해 14절의 예언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방 민족이 너희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그밖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고 고백하는 날이 올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심으로 자신을 더 나타내시고, 더 영광 받으시고, 더 적극적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감추시는 까닭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실 때마다 제한하시고 감추실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시면 사람들이 죽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구했지만, 하나님이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 한다. 나를 보고 살아남는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도 하나님은 영광을 숨기셨습니다. 그 영광의 지극히 일부분,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기이한 현상 정도만 나타내셨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놀랍고 신기해서 그분의 영광 앞에 경배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절규하는 욥에게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지극히 제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폭풍으로만 나타나셔도 욥은 침묵했습니다. <욥기> 전반부에서는 욥이 말을 많이 하고 하나님이 침묵 하시는데, 후반부에 가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욥이 침묵 합니다. 하나님이 폭풍으로만 잠시 말씀하셔도 인간은 입을 다물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주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계획하신 모든 일은 무엇이든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주님의 뜻을 가린 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말하고 너무 기이해서 알 수 없는 일들을 내가 내뱉었습니다”(욥 42:2~3).
회개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감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영광과 위엄, 임재를 다 나타내시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계획을 우리에게 모두 알려 주시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할 수 있는 만큼, 따라올 수 있는 지극히 일부분만 알려 주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숨으심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놀라운 하나님 계획의 과정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나는 주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계획하신 모든 일은 무엇이든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주님의 뜻을 가린 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말하고 너무 기이해서 알 수 없는 일들을 내가 내뱉었습니다”(욥 42:2~3).
회개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감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영광과 위엄, 임재를 다 나타내시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계획을 우리에게 모두 알려 주시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할 수 있는 만큼, 따라올 수 있는 지극히 일부분만 알려 주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숨으심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놀라운 하나님 계획의 과정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둘째, 하나님이 숨으신 까닭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했습니까? 정반대입니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가 있었습니까? 광야를 지나며 그들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했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적어도 열 번이상 하나님께 반항했습니다. 많은 기적과 표적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믿음 성장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기적을 기대할 뿐이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 시대 이스라엘이 망하는 상황처럼 하나님이 숨어계시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기간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만나는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때는 우리가 보는 것을 믿는 때가 아닙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을 때입니다. 사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진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실 때도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이 더욱 영광 받으십니다.
발견되는 기쁨을 누리시기 위해서
셋째,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시는 까닭은 발견되는 기쁨을 누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게 하려고 숨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발견되시려고 숨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실 때 그가 숨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마음에 숨는 것과 찾는 것이 본능적으로 들어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숨바꼭질의 기쁨은 못 찾는데 잊지 않고 적당한 때 찾는데 있습니다.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과 위기는 “나 여기 있다. 나를 찾아라. 나를 만나라”고 하나님이 위치를 드러내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숨어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을 새번역에서는 ‘숨어서 보신다’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지만 늘 발견되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찾는 자가 찾을 수 있도록 숨어 계십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영 하나님을 찾을 수 없도록 자신을 숨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집중해서 찾고 찾으면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았을 때 발견되는 기쁨을 서로 맛보기 원해서 자신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시대처럼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 우상을 택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택하면 영원한 구원을 얻습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계획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심으로 더 위대한 일을 행하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그 기쁨을 누리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랍니다. 개인의 삶과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서 숨어계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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