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델비아 교회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힘이 약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결코 약하지 않고, 귀하게 쓰임 받는 교회로 여기시며 칭찬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는 7개 도시 중에서 가장 신흥 도시입니다. 주전 2세기 중반에 세워졌습니다. 사데에서 동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여러 강과 산이 겹쳐져 비옥한 고원에 위치했습니다. 지리적으로 사데와 특성이 비슷했는데, 그중 하나가 지진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언제 지진이 일어날지 몰라 매우 불안정한 생활을 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지리적으로 사데 교회와, 영적 상황은 서머나 교회와 비슷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있었던 고난 중 하나가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가해진 핍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로마 당국이 핍박하기 전에 유대인 회당이 먼저 핍박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여러 지역을 정복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피지배 민족의 종교를 인정해줬습니다. 회당도 지을 수 있었고, 유대교에 속한 사람들이 회당에서 나름대로 신앙을 지키는 것을 보호해줬습니다. 통치를 하려면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는 철학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까지 말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흥 종교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은 곧 로마의 핍박의 대상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회당에서 예수 믿는 이들을 축출에서 내쫓아 버림으로써 로마의 핍박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사탄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자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 믿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로마 당국의 핍박 대상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혈통으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은 왜곡입니다.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입니다.
그 열쇠, 그 권세는 하나님께 있다!
“너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써라. 거룩하고 참되신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가 이렇게 말씀하신다”(7절).
유대인 공동체와 장차 로마 당국에 의하여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거룩하고 참되신 분, 곧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열쇠란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완전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겠다.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을 것이다”(사 22:22).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의 회당에서 자신들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 나라와 백성, 그것이 아닌 자들을 선언하고, 결정짓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열쇠를 가진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결정할 수 있는 권세는 너희들에게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분에게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배척받은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격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에 속했는지를 결정하는 그 열쇠, 그 권세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공동체와 장차 로마 당국에 의하여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거룩하고 참되신 분, 곧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열쇠란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완전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겠다.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을 것이다”(사 22:22).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의 회당에서 자신들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 나라와 백성, 그것이 아닌 자들을 선언하고, 결정짓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열쇠를 가진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결정할 수 있는 권세는 너희들에게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분에게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배척받은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격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에 속했는지를 결정하는 그 열쇠, 그 권세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렸지만, 좁은 문
“내가 네 행위들을 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가 없다. 이는 네가 힘이 약한 가운데도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8절).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축출되었을 때 그들 인생의 문, 믿음의 문, 기회의 문이 닫힌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열쇠를 가진 하나님이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열쇠를 가진 이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그 문은 닫힌 게 아니라 열려 있다는 말씀이 성도들에게 큰 격려가 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말씀하신 ‘열린 문’이 무엇인지 학자들 간에 크게 두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라는 견해와 ‘새로운 전도의 기회, 사역의 기회’라는 의견입니다. 단어 자체가 열린 문인데 어느 한 가지 해석만 주장하고 닫을 필요가 없습니다.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문’을 새로운 사역이나 전도의 기회라고 해석하면 적용할 점이 참 많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의 문이 닫혔다고 느끼는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고자 하는 상황마다 벽에 부딪히는 경험이 우리에게 놓여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눈물 흘리며 기도합니다. 신비로운 것은 바로 그때 내 앞에 보이지 않았던 게 보입니다. 그리고 닫힌 문 뒤에 찾아오는 열린 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의 삶과 사역을 인도하실 때 문을 닫으심으로써 새로운 문을 여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일 닫으셨다면 아무리 하소연하고 불평해도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열어 주셨다면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 길로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문을 막으심으로 새로운 문을 여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 그분께 더 큰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열쇠를 가지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 열쇠로 문을 열어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닫아 놓으신 문을 계속 두드려봐야 소용없습니다. 열쇠를 가지신 분이 열어주시는 문을 발견하는 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입니다.
‘열린 문’을 하나님 나라의 문으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린 문은 곧 열려있는 구원의 문을 의미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10:9~10).
다윗의 열쇠를 가진 예수님이 구원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이며 동시에 문이 되십니다. 인류가 멸망당하는 노아의 홍수 때 제작한 방주도 문이 하나입니다. 성막에도 성전에도 문이 하나입니다. 구원의 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문인 것은 구원받는 다른 문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아래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해 아래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구원의 문은 활짝 열린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험해 그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 7:13~14).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렸지만, 동시에 좁은 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그 문을 외면합니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좁은 문입니다. 나의 노력과 공로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공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좁은 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방법 외에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겸손이 나와 이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활짝 열린 문입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축출되었을 때 그들 인생의 문, 믿음의 문, 기회의 문이 닫힌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열쇠를 가진 하나님이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열쇠를 가진 이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그 문은 닫힌 게 아니라 열려 있다는 말씀이 성도들에게 큰 격려가 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말씀하신 ‘열린 문’이 무엇인지 학자들 간에 크게 두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라는 견해와 ‘새로운 전도의 기회, 사역의 기회’라는 의견입니다. 단어 자체가 열린 문인데 어느 한 가지 해석만 주장하고 닫을 필요가 없습니다.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문’을 새로운 사역이나 전도의 기회라고 해석하면 적용할 점이 참 많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의 문이 닫혔다고 느끼는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고자 하는 상황마다 벽에 부딪히는 경험이 우리에게 놓여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눈물 흘리며 기도합니다. 신비로운 것은 바로 그때 내 앞에 보이지 않았던 게 보입니다. 그리고 닫힌 문 뒤에 찾아오는 열린 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의 삶과 사역을 인도하실 때 문을 닫으심으로써 새로운 문을 여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일 닫으셨다면 아무리 하소연하고 불평해도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열어 주셨다면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 길로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문을 막으심으로 새로운 문을 여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 그분께 더 큰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열쇠를 가지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 열쇠로 문을 열어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닫아 놓으신 문을 계속 두드려봐야 소용없습니다. 열쇠를 가지신 분이 열어주시는 문을 발견하는 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입니다.
‘열린 문’을 하나님 나라의 문으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린 문은 곧 열려있는 구원의 문을 의미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10:9~10).
다윗의 열쇠를 가진 예수님이 구원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이며 동시에 문이 되십니다. 인류가 멸망당하는 노아의 홍수 때 제작한 방주도 문이 하나입니다. 성막에도 성전에도 문이 하나입니다. 구원의 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문인 것은 구원받는 다른 문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아래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해 아래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구원의 문은 활짝 열린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험해 그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 7:13~14).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렸지만, 동시에 좁은 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그 문을 외면합니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좁은 문입니다. 나의 노력과 공로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공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좁은 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방법 외에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겸손이 나와 이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활짝 열린 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세 가지 약속
주신 세 가지 약속
하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신 이유는 그들이 심히 약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규모도 작고, 로마 사회에서 낮은 신분 계층으로 구성되었다면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결코 약점이 아니었습니다. 그 약함이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힘이 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믿음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핍박받는 시험에 처해 있지만,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겨 냈습니다. 그래서 칭찬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강점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데는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는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하나님 능력을 체험하는 데는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함 가운데 믿음을 지킨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세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 대적자들이 그들의 발 앞에 꿇어 엎드리게 되고,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알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보라. 내가 그들로 네 발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할 것이다”(9절).
‘꿇어 엎드리게 한다’는 것은 굴복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핍박했던 유대인 회중 가운데서 예수 믿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거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약함 가운데 믿음을 지킨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세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 대적자들이 그들의 발 앞에 꿇어 엎드리게 되고,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알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보라. 내가 그들로 네 발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할 것이다”(9절).
‘꿇어 엎드리게 한다’는 것은 굴복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핍박했던 유대인 회중 가운데서 예수 믿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거라는 약속입니다.
둘째, 온 세상에 임하는 시험으로부터 지켜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네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 온 세상에 시험이 닥칠 때 나도 너를 지켜 줄 것이다”(10절).
지금까지 경험한 시험보다 더 큰 시험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험에서도 너를 지켜 줄 거라는 약속입니다.
“내가 네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 온 세상에 시험이 닥칠 때 나도 너를 지켜 줄 것이다”(10절).
지금까지 경험한 시험보다 더 큰 시험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험에서도 너를 지켜 줄 거라는 약속입니다.
셋째,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한다고 약속입니다.
“이기는 사람을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으로 삼을 것이니 그가 결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내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기록할 것이다”(12절).
늘 지진으로 요동치는 땅에서 언제 건물이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사람을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으로 삼을 것이니 그가 결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내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기록할 것이다”(12절).
늘 지진으로 요동치는 땅에서 언제 건물이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약함 속에서도 우리가 믿음의 순리대로 살아가면 영원한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흔들리고 무너질 것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성전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둥에 새 이름이 적힙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고, 그분의 공동체 속한 성도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11절).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는 말씀이 두렵습니까? 아니면 기쁨입니까? “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결코 믿음의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약함 가운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게 장애입니다. 시험의 때는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시험을 이길 믿음이 부족한 게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세상 모든 거짓과 악이 심판받을 것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11절).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는 말씀이 두렵습니까? 아니면 기쁨입니까? “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결코 믿음의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약함 가운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게 장애입니다. 시험의 때는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시험을 이길 믿음이 부족한 게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세상 모든 거짓과 악이 심판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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