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반복하며 강조했던 이유는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어린양과 용의 전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과 용을 따르는 사람들의 대조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이 대조의 뿌리에 하나님과 사단의 전쟁이 있습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과 용을 따르는 사람들의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어린양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용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대적해 싸울 것이나 어린양이 그들을 이길 것이다. 이는 그가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곧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충성된 사람들도 이길 것이다”(계 17:14).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자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시대에도 용을 따르는 이들이 어린양과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을 공격 했듯이, 이 시대에도 동일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용은 세 가지 방식으로 어린양을 공격합니다. 첫째, 쾌락, 둘째, 거짓된 가르침, 셋째, 박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공격에도 어린양을 신실하게 따르는 이들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대적해 싸울 것이나 어린양이 그들을 이길 것이다. 이는 그가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곧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충성된 사람들도 이길 것이다”(계 17:14).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자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시대에도 용을 따르는 이들이 어린양과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을 공격 했듯이, 이 시대에도 동일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용은 세 가지 방식으로 어린양을 공격합니다. 첫째, 쾌락, 둘째, 거짓된 가르침, 셋째, 박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공격에도 어린양을 신실하게 따르는 이들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어린양’입니다.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을 찔렀던 사람들도 볼 것이며 땅의 모든 민족이 그분으로 인해 통곡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7절).
‘보십시오’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또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보다 정확한 번역은 ‘구름과 함께 오십니다’입니다. 예수님이 구름과 함께 가셨고, 구름과 함께 오신다는 것입니다. 구름이 하나님 임재의 상징으로 성경에서 계속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자가 그분을 보게 될 것이고, 오래전에 죽은 자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찔러 죽인 자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찔러 죽인 자입니까? 예수님을 외면하고, 무관심하고, 대적했던 모든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 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통곡하는 자들도 있을 거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끝까지 무관심하고, 바라보지 않은 이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을 깨닫고 통곡할거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이 말씀과 환상 가운데 발견한 예수님은 첫째, 영광스럽게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옷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제사장의 옷입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은 정반대 역할을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제사장은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나가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이제 머리와 눈을 봅니다. 머리와 눈은 그분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칼은 흰 양털과 눈처럼 희다고 했고, 눈은 타오르는 불같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칼은 우리의 죄를 흰 눈처럼 양털처럼 희게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의 눈이 타오르는 불과 같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부정한 것, 순수하지 못한 것을 태우시고, 우리를 정결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발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분의 발은 용광로에서 제련된 청동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발은 용광로에서 제련된 청동입니다. 청동은 철과 구리를 합한 것입니다. 청동은 아주 견고하고 단단한 기초가 됩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 기초입니다.
이제 그분의 입을 주목합니다. 그분의 입에서 좌우의 날이 선 검이 나옵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은 칼과 같은 말씀을 가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무력과 재물에서 나오지만,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의 힘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보십시오.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을 찔렀던 사람들도 볼 것이며 땅의 모든 민족이 그분으로 인해 통곡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7절).
‘보십시오’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또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보다 정확한 번역은 ‘구름과 함께 오십니다’입니다. 예수님이 구름과 함께 가셨고, 구름과 함께 오신다는 것입니다. 구름이 하나님 임재의 상징으로 성경에서 계속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자가 그분을 보게 될 것이고, 오래전에 죽은 자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찔러 죽인 자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찔러 죽인 자입니까? 예수님을 외면하고, 무관심하고, 대적했던 모든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 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통곡하는 자들도 있을 거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끝까지 무관심하고, 바라보지 않은 이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을 깨닫고 통곡할거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이 말씀과 환상 가운데 발견한 예수님은 첫째, 영광스럽게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옷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제사장의 옷입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은 정반대 역할을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제사장은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나가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이제 머리와 눈을 봅니다. 머리와 눈은 그분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칼은 흰 양털과 눈처럼 희다고 했고, 눈은 타오르는 불같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칼은 우리의 죄를 흰 눈처럼 양털처럼 희게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의 눈이 타오르는 불과 같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부정한 것, 순수하지 못한 것을 태우시고, 우리를 정결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발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분의 발은 용광로에서 제련된 청동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발은 용광로에서 제련된 청동입니다. 청동은 철과 구리를 합한 것입니다. 청동은 아주 견고하고 단단한 기초가 됩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 기초입니다.
이제 그분의 입을 주목합니다. 그분의 입에서 좌우의 날이 선 검이 나옵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은 칼과 같은 말씀을 가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무력과 재물에서 나오지만,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의 힘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시작과 끝
그리고 시작과 끝
요한이 그분의 발 앞에 ‘죽은 자 같이 엎드려 졌다’고 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이 역사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시대의 주권적인 주님입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에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시작과 끝이라는 표현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의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입니다. 그 안에 있는 알파벳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도 같은 맥락입니다. 역사의 시작이시며 마지막이신 분의 의미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역사의 통치자, 주권자가 바로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요,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신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사 44:6).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역사의 마침표를 찍으시며, 영원한 나라의 부활의 첫 열매로써 영원한 나라를 우리가 시작하도록 이 땅을 종결하시는 분입니다. 이 시대에 이런 역사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통치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은 모두 멸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요,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신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사 44:6).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역사의 마침표를 찍으시며, 영원한 나라의 부활의 첫 열매로써 영원한 나라를 우리가 시작하도록 이 땅을 종결하시는 분입니다. 이 시대에 이런 역사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통치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은 모두 멸하십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그분 예수님
앞으로 오실 그분 예수님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은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영원토록 살아계신 분입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현재 밖에 없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서는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영원과 시간의 다른 점입니다. 영원은 시간이 오래 지속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차원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릅니다. 내일은 오늘이 되고, 또 오늘은 과거가 되고, 과거가 현재, 현재가 미래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영원은 언제나 현재만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것을 ‘영원토록 살아계신 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과거도 현재고, 우리의 미래도 현재고, 우리의 현재는 당연히 현재입니다. 그분께는 우리의 과거도 현재입니다. 우리 미래도 현재입니다. 예수님께는 언제나 현재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미래에도 계신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 영원하신 분이 이 세상의 시간과 역사 속에 오셨고, 이제 영원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나는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으나 보라, 나는 영원토록 살아 있는 자니 나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다”(18절).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 죽음의 음부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시간의 제한을 받는 우리가 죽음의 벽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기에 죽음의 열쇠,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까지도 지배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류가 지배 하지 못한 유일한 한 가지가 죽음입니다. 죽음의 열쇠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예수님께 주어져 있습니다.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는 열쇠를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는 살아 있다”(눅 20:38).
하나님께는 죽은 자도 여전히 살아있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죽음의 의미와 우리가 보는 죽음의 의미가 다릅니다. 우리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들 눈에서 사라지면 하나님이 더는 찾을 수 없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를 여전히 살아있는 자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하나님 앞에 서면 살아있는 자로 심판을 받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인생 속에서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역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 앞에서 살아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요한은 이 환상을 보기 전에 홀로 유배되어 공동체와 단절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곱 교회가 점점 침체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사역자가 되었고, 성령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교회를 일깨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현재 밖에 없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서는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영원과 시간의 다른 점입니다. 영원은 시간이 오래 지속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차원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릅니다. 내일은 오늘이 되고, 또 오늘은 과거가 되고, 과거가 현재, 현재가 미래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영원은 언제나 현재만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것을 ‘영원토록 살아계신 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과거도 현재고, 우리의 미래도 현재고, 우리의 현재는 당연히 현재입니다. 그분께는 우리의 과거도 현재입니다. 우리 미래도 현재입니다. 예수님께는 언제나 현재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미래에도 계신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 영원하신 분이 이 세상의 시간과 역사 속에 오셨고, 이제 영원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나는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으나 보라, 나는 영원토록 살아 있는 자니 나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다”(18절).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 죽음의 음부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시간의 제한을 받는 우리가 죽음의 벽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기에 죽음의 열쇠,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까지도 지배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류가 지배 하지 못한 유일한 한 가지가 죽음입니다. 죽음의 열쇠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예수님께 주어져 있습니다.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는 열쇠를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는 살아 있다”(눅 20:38).
하나님께는 죽은 자도 여전히 살아있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죽음의 의미와 우리가 보는 죽음의 의미가 다릅니다. 우리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들 눈에서 사라지면 하나님이 더는 찾을 수 없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를 여전히 살아있는 자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하나님 앞에 서면 살아있는 자로 심판을 받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인생 속에서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역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 앞에서 살아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요한은 이 환상을 보기 전에 홀로 유배되어 공동체와 단절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곱 교회가 점점 침체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사역자가 되었고, 성령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교회를 일깨웠습니다.
이 시대도 영광스럽고,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어린양을 따를 때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제국들은 모두 무너질 것입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만이 영원한 나라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로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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